치료 5주, 맑은 뒤 흐림
항우울제의 약효는 보통 한두 달은 걸린다는데, 나는 비교적 빨리 효과를 본 듯했다.
부작용 때문에 약을 바꾸는 과정도 없었다. 약간의 불편함은 있었지만 금세 지나갔다.
부서지고 또 부서졌던 파도 같던 나날에서, 잔잔한 호수가 된 요즘.
얼마간 평온하고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 위기 D-1
쌓여가는 일, 쌓여가는 마음
- 그날은 본청과 사업소 두 군데 출장을 다녀와야 했는데, 동료가 제3의 장소까지 업무를 부탁했다.
정해진 일도 아니고 물건을 직접 여기저기 찾아서 사 오라는 부탁. 초보 운전자인 나에겐 초행길과 갓길 주차가 두려웠지만, 오전 11시까지 세 가지 일을 마쳐야 했다. 준비 시간까지 계산하면 고작 한 시간 반.
결론은, 해냈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며 진이 빠졌다.
- 7월부터 인력이 한 명 비어 일이 늘었다. 처음 해보는 업무는 서툴고 느렸다.
- 게다가 1월부터 연차를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일만 해왔다. 너무 힘들어 하루쯤 쉬고 싶었지만 일에 밀려 못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 한두 시간씩 조퇴를 하면서도 상사의 눈치가 보였다. 남들은 며칠씩 휴가를 쓰는데 나도 쉬고 싶다는 마음이 치밀었다.
- 상사의 연말 행사 준비 압박은 벌써부터 시작됐다. 오늘 당장 처리할 일도 버거운데...
- 휴가자에게 긴급한 일로 연락을 하니 마음이 무겁다. 가급적 쉬는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더 마음이 좋지 않다.
# 위기 D-day
점심시간, 스타벅스에 숨어 오열하다
- 출근하자마자 갑자기 컴퓨터가 말을 듣지 않았다. 모니터가 켜지지 않아 허둥대다 겨우 연결했더니, 이번엔 화면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화면 보호기도 작동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프린터까지 고장 나 두 시간을 땀 흘리며 매달려야 했다.
- 바쁜 와중에 내 업무도 아닌 휴가자의 일을 떠맡았다. 타 시군에서 벤치마킹을 와서 우리 사업소를 소개하는 일이었는데, 담당자가 아닌 탓에 실무를 잘 몰라 한 시간 동안 진땀을 뺐다.
- 상사는 또다시 연말 행사 준비를 재촉했고,
- 팀원들은 부서 카드 사용법을 이미 공지했음에도 제멋대로 처리한 뒤 나에게 딴소리를 했다.
감정이 치밀었지만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러다 마침내 점심시간,
겹겹이 쌓여 있던 일상의 무게에
겨우 버티던 마음이 끝내 무너져버렸다.
보통은 다 같이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먹지만, 그날은 “밖에서 먹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서는 순간,
꾹꾹 눌러두었던 눈물이 쏟아졌다.
누가 볼까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해 근처 스타벅스로 몸을 숨겼다.
구석 자리에 앉아 빵을 한 입 베어 물자,
눈물이 다시 터졌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뜨거운 눈물에 젖은 빵을 삼켰다.
# 사무실 복귀, 모두 앞에서 터져버리다
1시가 되어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복귀했다.
그러나 퉁퉁 부은 내 눈을 본 동료들이 무슨 일이냐 묻자마자
참아왔던 울음이 다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일하면서 화장실에 숨어 운 적은 있었지만,
사무실 한가운데서 무너진 건 처음이었다.
동료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 했지만 목이 막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어깨는 크게 들썩이고 숨은 가빠졌다.
눈물이 쏟아져 앞이 보이지 않았고, 내 울음소리가 사무실 공기를 가득 채웠다.
놀란 동료 몇몇은 내 앞에서 얼어붙었고, 몇몇은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5분 넘게, 단어 하나 내뱉지 못한 채 그저 펑펑 울음을 쏟아냈다.
# 애써 괜찮은 척, 그래도 해낸 나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뒤, “요즘 스트레스가 좀 쌓인 것 같아요.” 하고 두리뭉실하게 답했다.
내가 바쁘게 일하는 걸 다들 알고 있기에, 그저 가볍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사실 감정 때문에 업무를 이어가기 어려워 처음엔 조퇴를 고민했다.
하지만 주변에 민폐가 될까 마음을 다잡고, 괜찮은 척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켜냈다.
퇴근길, 문득 생각했다. '만약 낮에 울음을 터뜨린 채 퇴근했다면 더 괴로웠을 거야.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오늘 하루의 책임을 다한 내가 자랑스럽다.'
# 우울의 심연, 잠 못 이루는 밤
하지만 그 자부심도 잠시,
집에 돌아오자 깊은 우울이 다시 밀려와 나를 삼켜버렸다.
쌓이고 쌓인 일상의 스트레스와 마음의 무게에 짓눌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새벽 다섯 시까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얼굴을 적셨고,
눈가는 퉁퉁 부어 따갑고 화끈거렸다.
마음이 칼끝에 베이는 듯 아팠다.
쏟아지는 일들에 지쳐 결국 감정을 다잡지 못한 채 직장 사람들 앞에서 울어버렸다는 수치심,
성숙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나를 짓눌러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우울증을 늦었지만 비로소 알게 되었고,
정신과 약물치료를 시작하며 잊고 있던 행복을 조금씩 되찾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시 직장이었다.
남들에겐 그저 잔물결일 일상의 파도가, 내겐 거대한 해일이 되어 감정을 집어삼켰다.
우울증 치료 시작 후 얼마간의 평화 뒤,
위기는 이렇게 또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