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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우울증 환자의 "저 너무나 평안해졌어요"

치료 3~4주, 두번째 진료. 놀라운 변화

by 공쩌리


작은 약 하나가 내 삶에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 두 번째 진료

정신과의 진료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그 안에 증상을 정확히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평소 카카오톡 ‘나에게 쓰기’에 감정과 변화를 기록해 두었다가, 진료 전 내용을 정리해 복기한 뒤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 초기 부작용: 졸음, 어지러움, 두근거림

- 효과: 숙면, 짜증·분노 완화, 부정적 사고 감소, 무기력 완화

- 아직 남은 증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무기력, 선명해진 우울·절망감


특히 수치심, 죄의식, 죄책감은 여전했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것 같고, 매일 흑역사를 쓰는 기분이었다. 밖에서 대화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이 말을 왜 했을까, 말실수한 건 아닐까” 곱씹으며 이불킥을 했다.


또한 푸록틴은 부작용으로 무려 식욕 저하(!)가 있다 여 은근히 기대했건만, 내 식욕은 약을 이겼다. 식욕은 여전했다.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내가 복용 중인 푸록틴 10mg은 하루 최대 용량 80mg의 1/8 수준이라 식욕 저하 효과는 미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 “저, 너무나 평안해졌어요”라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변화다.


# 원래의 내 모습으로

무엇보다 나를 가장 괴롭히던 짜증, 분노, 화, 감정 기복이 거의 사라졌다.


그 덕분에 남편과의 관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예전에는 내 성향 탓에 사소한 다툼과 감정 소모가 잦았고, 단순히 혼자 있고 싶다는 이유로 이혼까지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저 내가 ‘개인주의 아내’라서 남편과 부딪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고 난 지금, 오랜만에 가정의 평화를 마주하게 되었다.


연애 포함 15년을 함께한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 힘들어하며 우울증까지 오고 참 많이 변했었는데... 이제 원래 네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 일상의 위기 대처

나는 평소 집안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화가 미친 듯이 치밀곤 했다.


어느 날도 냉장고에 국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과일이 놓여 있는 걸 보고 순간 화가 치솟았다. 예전 같으면 냉장고 문을 콱 닫아버리고 혼자 소리 지르며 참지 못하고 직장에 있는 남편에게 카톡으로 갖은 짜증을 퍼부었겠지만, 그날은 기다렸다. 그리고 퇴근한 남편에게 내 감정을 '나 전달법'으로 조곤조곤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전에는 무기력증 탓에 직장일만으로도 금세 방전되었다. 퇴근하면 씻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겨우 몸을 추스르며 씻고 밥을 먹은 뒤 쓰러지듯 잠들기 일쑤였다. 나 하나 감당하기도 벅찬 날들이었다.


그런데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고 난 어느 날, 늘 묵묵히 나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온 남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야 보였던 것이다. 빨래, 청소, 설거지, 쓰레기 버리기, 장보기, 밥 하기... 그가 해온 많은 일들이 내 생활을 지탱해 왔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 친구 관계

사람들의 언행에 흔들리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예전엔 친구들과 만나고 나면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고, 집에 와서 혼자 곱씹으며 빈정 상해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즐겁게 놀고,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편했다. 정말 오랜만에 뒤끝 없는 후련한 감정이었다. 예민 보스였던 시절, 나에게 불편하거나 싸한 느낌을 받았을 텐데도 늘 곁을 지켜주던 친구들의 존재가 참 고마웠다.



약 하나로 시작된 변화가, 무너졌던 나를 조금씩 일으켜 세웠다.

마음의 무게가 덜어지니, 모든 것이 전과는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아, 다른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걸까?


매일 걷던 동네 산책길의 풍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상쾌했다. 하늘도 아름다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이 세상도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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