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허공이 잔뜩 흐리다. 딱히 갈 곳이 없어 나만의 틀에 갇혀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가끔 환상 속을 헤맨다. 틀어박힌 나의 반경은 참 좁다. 그래서일까 가끔 단조로움을 느낀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길로 다니며, 같은 사람들과 대화한다. 반복적인 패턴으로 가득 차 있는 나날이다.
문득, 고모가 생각난다. 봄이나 가을이면 밭고랑을 헤매며 냉이를 캐서 맛있는 국을 끓여주던 고모는 마치 자신도 흙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냉이 같았다. 고모는 시골 외딴마을에서 태어나 그 마을에서 자라 그 마을남자와 결혼을 했다. 시대가 그래서일까. 고모는 도시와는 먼 삶은 살았다. 그 흔해빠진 버스조차 타 볼 기회가 없었다. 어쩌다가 <영양>에서 <진보>에 있는 우리 집까지 오려면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서야했다. 오다가 해가 지면 중간 지점인 입암면 소제지에 있는 사찰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1박 2일에 걸쳐 우리 집을 찾는 고모가 안타까워 엄마는 매번 버스를 이용해보라고 권했지만, 고모는 그때마다 차멀미가 더 무섭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고모도 노년이 되자 걸어 다니는 것이 힘에 부쳤던지 몇 번이나 버스를 이용해보려고 시도 했지만, 차멀미로 초죽음이 되곤 했다. 혹시라도 멀미에 도움이 될까 해서 생강이나 오징어를 씹으며 버스를 타거나 술을 마시고 이용하기도 했다. 고모는 자신을 옥죄는 차멀미의 틀을 깨기 위해 엄청 노력했지만,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그런 고모를 떠올리면 나 또한 고모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다. 평생 주부로 살면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웅크려왔기 때문이다. 한 곳에 매몰된 생활방식은 굳어질 대로 굳어졌다.
어느 날 고모의 일화와 닮아가는 나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주자 친구는 딱하다는 듯 말했다.
“이 넓은 세상에…? 고모는 시대적으로 그럴 수 있다지만, 너는 왜 처박혀사냐? 인생 짧아. 말 나온 김에 당장 바꿔봐.”
늦었지만, 소소한 변화를 가져보기로 했다. 매일 가던 길 대신 새로운 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마땅치 않았지만,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점차 흥미를 느낀다. 서로 다른 색깔이 섞이는 것만으로도 변화였다. 나는 의도적으로 내가 갇혀있는 틀에는 바퀴가 서식한다고…, 그래서 내 창가에는 온통 탈출을 꿈꾸는 야행성이 바글거린다고…, 그것들은 눈에 띄지 않을 뿐, 야밤에 불을 밝히고 뭔가를 쓰기 위해 끙끙댄다고…, 나는 나의 야행성이 빨리 달아나버리길 바랐다. 주방이나 거실, 컴퓨터 방을 살펴보면 어디선가 나타날 바퀴들…, 준비 없이 박멸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변화는 대 혼란이다. 왜 갑자기 변해야하는지조차 헷갈린다. 변화가 좋다는 확신도 없다. 결국 나는 다시 주저앉을 지도 모른다. 틀을 깬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 변화가 아니라, 내면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친구도 그런 나를 점차 이해하는 듯하다. 분명한 건 더는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는 것, 나는 오늘도 창가에 서서 수시로 창밖을 기웃거린다. 잔득 흐려있던 허공에서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창밖과는 달리 실내는 따뜻하다. 나의 굴레는 여전히 편안하고 안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