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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밤이 지나가는 동안 세상을 덮어버린 함박눈은
마치 고모의 첫날밤을 훔쳐보려고 이웃들이 뚫어놓은 창호지 구멍 같다.
짓궂은 눈구멍에 또 눈이 내렸다.
흰 드레스 입고 입장하는 신부보다 한 발 앞서
뽀득뽀득 융단을 밟는 설레임들은
삶의 희비를 훔쳐보느라 빠끔빠끔! 내민 얼굴들이다.
뜰에 서있는 백 살쯤 나이 먹은 전나무도
오십 중반쯤 되어 보이는 편백나무도
모두 혼례의 하객들이다.
첫날밤이 지나가면 순백의 마음도 잠시 뿐이라고
가지를 찢거나 쓰러뜨릴 수 있다고
삶은 지저분하고 위험할 수 있다고
눈이 내려도 충혈 되지 않는 내 눈은
상상의 눈구멍 앞에서 희비에 헷갈린다.
은색 종이가루 뿌려대는 무대 위 마술사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인가를 찾아드는 허기진 야생동물들이 보인다.
눈에 눈을 담고도 붉게 충혈 되지 못하는 내 눈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