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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달려봅니다

프롤로그

by 겨울새 Winter Robin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오래 달린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때는 술래 잡기를 위해서 간헐적으로 뛰었다.

그때도 술래를 선호했다.

뛸 수 있는 만큼만 뛰면 되니까.


학창 시절에는 체력 검사를 위해서 뛰었다.

50m, 100m는 좀 창피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거리도, 시간도 짧았고,

내 뒤에는 곧장 다른 누군가가 뛰어서 나는 잊혀졌으니까.

400m가 그야말로 난관이었다.

오래 뛰어서 힘들 뿐 아니라,

내가 완주할 때까지 선생님이 기록을 재신다는 게 힘들었다.

스탠드에서 먼저 완주한 반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그런 압박 속에서

맨 마지막 완주자가 안되려고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몸도 괴롭지만, 불안과 창피함이 더욱 힘겨웠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아주 가끔씩 러닝머신 위에서 뛰었다.

1분 정도 뛰다가 입안에서 피맛이 올라오면 포기.

쿵쿵 울리는 발도, 무릎도 아프고, 무엇보다 금방 지쳤다.

숨이 차서 어질어질하기까지 했다.

그뿐이랴.

몰아쉬는 숨이 되돌아오는 데는 몇 배의 시간이 걸렸다.

옆이나 뒤에서 운동하는 사람들 눈치도 보였다.

겨우 1분 뛰고 헉헉 거리며 땀을 뻘뻘 흘리는 게 창피했다.

그 뒤로는 그냥 빨리 걸었다.

한번 뛰어봤으니,

그 끔찍한 기억이 없어질 때까지 다시 달리지 않았다.

아니, 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달리고픈 욕망은 늘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무언가로부터 도망칠 때도

무언가를 다급히 쫓을 때도

출중한 달리기 실력은 늘 중요했다.

또,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각자의 속도로 달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언젠가는 배워둬야지,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그저 생각일 뿐.

그 욕망은 오래오래 하나의 이상으로 고이 넣어뒀다.


이렇게 살아온 터라,

달리기는 앞으로도 나와는 관련이 없을 줄 알았다.

달리고 싶지만, 달리는 나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1분만 뛰어도 힘든 그 거대한 벽을 넘어설 자신이 없고,

헬스장이든, 공원이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설프게 달리는 내 모습이

상상만으로도 부끄러웠다.


그런데 작년 말,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 슬로우조깅이 떴다.

그리고 올해 초,

느릿하고 꾸준하게 슬로우조깅을 시작했다.


아쉽게도,

아직 뭐 하나 내놓을만한 대단한 결과가 있는 건 아니다.

자격증은 땄지만 코치로 거듭난 것도 아니고,

체중이 10kg씩 감량한 것도 아니다.

그저,

달리는 걸 상상도 못 하던 내가

이제는 내 뜻으로 달리고 있다.


심지어 즐겁게.


달리는 것은 달리는 것뿐이 아니다.

내 생활, 내 생각, 내 정체성,

그리고 결국 내 인생과 연결된다.

그 사실을, 달려보고 나서야 몸소 알 수 있었다.


빠름이 강조, 혹은 강요되는 세상 속에서

모순적이게도

빠르지만 느린, 느리지만 빠른 슬로우조깅은

빠르고 느리게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전하고 싶다.

슬로우조깅을 하다 보면,

눈에 띄는 업적이 아니더라도

보이지 않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경험을,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다고.


이제부터,

별 거 없지만 특별한

내 슬로우조깅 라이프에 대해 나누려 한다.


빠르고, 느리고,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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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