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추락하는 50대 만년 부장 이야기
후배가 하루아침에 직장 상사가 되는 날이다. 밤에는 술친구, 낮에는 직장 상사인 박상무는 힘겹게 나에게 통보했다. 그러나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는 야비한 사람이다. 나도 야비하게 그를 이용하려 했지만 내 야비함은 부족했다. 나와 경쟁을 하던 후배가 상무로 진급하여 박상무 자리로 온 것이었다. 내 사전에 전혀 들어있지 않은 0.1%의 확률적인 일이 내 앞에 펼쳐졌다. 아니 어쩌면 나만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뒤통수를 맞았든 앞통수를 맞았든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직원들이 다들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어제까지 내가 승진할 거라며 카톡을 하고 술 한잔하자고 하던 친구들이다. 부서 직원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컴퓨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나 복도로 향했다. 내 뒤에 직원들의 시선이 수십 개가 따라오는 듯했다. 복도로 나가는 문열림 버튼을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마터면 문에 부딪힐 뻔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버튼을 눌렀다. 급하게 나가려다 열리는 문에 부딪혀 쿵 소리가 났다.
엘리베이터는 내려가는 중이다. 나는 20층에 근무하고 있어서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와야 한다. 직원들이 화장실을 가려고 엘리베이터 홀을 지나다니며 나에게 목례를 했다. 나는 고개만 까딱하며 엘리베이터 숫자판만 응시했다.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대표님 얼굴이 보였다. 탈까 말까 고민하다 대표님이 부르는 소리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디 가나?"
대표님은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평소와 같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넸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불과 몇 초밖에 안 되는 내려가는 시간이 하루가 지나가는 듯했다. 좁은 엘리베이터가 묘지 속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대표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능글맞게 모른 척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한 다리 건너니 그래도 대표는 용서가 된다. 그러나 바로 위 상사인 박상무는 미치도록 얄밉다.
무작정 걸었다. 한 해가 저물고 있는 시점이라 날씨가 추웠다. 간간히 눈발도 날렸다. 갑자기 애들 생각이 났다.
승진하여 신나게 자랑하며 기분 낼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취임사를 어떻게 할까 써보기도 하고...
나는 회사에서 잘 나가는 그룹에 속해있다. 대리 시절에 근무하던 부서 선배들이 다들 잘 되어서 고속 승진을 하고 있다. 그래서 10년이 넘게 만년 부장을 하면서도 임원 승진의 꿈은 더욱 커졌다. 직속 상사인 박상무도 같은 멤버이고 기획과 영업 쪽에 헤드도 멤버다. 요직은 다 맡고 있고 나만 승진이 안 되고 있었다.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어디서 잘 못 되었는지 아무리 자문해도 명쾌하게 다가오는 게 없다.
그저 같은 멤버들이 원망스러웠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경쟁하던 후배를 내 상사로 앉히다니. 아니 엄밀히 말하면 경쟁상대도 안 되는 후배라고 생각하고 제쳐놓고 있었다. 방심이 화근이 된 걸까. 어떻게 하면 이 거대한 모순덩어리를 부셔버릴 수 있을까.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나는 스카이는 아니라도 서울에서 괜찮은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고 승진한 후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간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작년까지 승진에 학벌이 중요하게 반영되었었다. 눈물이 찔끔 났다. 서러워서 인지 아니면 추워서 인지. 너무 몸이 으슬으슬해 보니 상의는 입었는데 코트를 갖고 나오지 않았다. 무시하고 오기로 멈추지 않고 걸었다. 차라리 지쳐 쓰러지더라도 걷고 싶었다.
어디서 바람소리가 나며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배민이라고 쓰인 오토바이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차도를 걷고 있었다. 몇 주 뒤에 있을 부서장 인사가 걱정이 되었다. 분명히 승진한 후배는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어디로 간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쥐 죽은 듯이 지금 부서에 있어야 하나. 고난의 가시밭길이 시작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