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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니 Aug 01. 2021

서프라이즈 선물로 배우자의 취향을 저격하는 방법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분홍색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예쁘네?"


 새로 산 분홍색 여름 파자마를 입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내 뒤통수에 남편의 한 마디가 꽂혔다. 내 남편이지만 참 뒤끝이 길다. '예쁘네'라고 칭찬을 덧붙이기는 했다만, 저 말에는 '왜 예전에 내가 사준 분홍색 옷은 안 입었어?' 하는 원망이 담겨있다. 사건의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연애를 시작한 지 100일째 되던 날 남편(당시 남자 친구)은 백화점에서 커플 후드 티셔츠를 사 왔다. 그의 것은 시크한 오버핏 회색 후드티였고, 나의 것은 북극곰이 그려진 딸기우유 빛깔의 후드티였다. 처음에는 '와 예쁘네'하고 받아 들었는데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표정으로 이미 다 들킨 것 같다. 그게 2-3만 원짜리 옷이었다면 선물한 사람 성의를 생각해 데이트 때 몇 번 입고 나갔겠지만, 10만 원이나 하는 옷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고민에 빠졌다. 그에게는 정말 미안했지만 이왕 큰돈을 쓰는 거라면 선물 받는 사람이 더 자주 오랜 기간 입어주면 좋을 것 같아서 교환을 택했다. 그는 쿨하게 '노 프라블럼' 이라며 매장에 가서 함께 옷을 교환했는데, 돌아오는 길에서야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그 매장에 가서 엄청 오랜 시간 고민을 했고 점원 분과도 상담을 하다시피 하며 옷을 골랐는데 결국 여자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해서 바꾸러 갔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해졌다는 거다. 그 얘기를 듣고는 미안한 마음에 그냥 입을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나는 여전히 북극곰이 그려진 분홍색 후드티보다는 시크한 오버핏 회색 티셔츠가 훨씬 좋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100일 기념 커플 티셔츠는 우리 둘 다 아직까지도 잘 입고 있다.


100일 기념 커플 티셔츠, 100일 된 커플의 깨발랄한 표정은 비밀에 부친다.


 그래도 그때 그냥 분홍색 후드티를 예쁘다고 받아둘 걸 그랬다 싶은 이유는 그 뒤로 남편으로부터 옷 선물을 한 번도 받지 못했기 때문. 나의 대쪽 같은 취향과 의사표현이 그에게 상처를 준 게 분명했다.



한동안 그의 메신저 프로필을 차지했던, 말린 수국 꽃잎.


 하지만 감동스럽고 좋았던 선물은 그만큼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되돌려 주었다. 사귀기로 한 뒤 첫 데이트에 그는 수국 꽃다발을 사 왔다. 그날의 수국, 그날의 분위기, 그날의 그를 모두 기억하고 싶어서 수국 꽃잎을 곱게 말려 그에게 쓰는 편지에 붙여줬는데 그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만나 온 여자 친구들로부터 꽃 선물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너의 선물을 이렇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표시하고 싶었고, 시들었다고 버리기에는 우리의 추억이 너무 소중하기에 한번 더 기억하고 싶었다. 결혼한 후에도 그가 사준 꽃들은 곱게 말려두고 있다. 꽃을 자주 사주는 그이기에 드라이플라워가 너무 많아져 이사를 하거나 짐 정리를 할 때면 한 번씩 그의 허락을 받고 정리하지만, 꽃잎 몇 개는 나만 아는 책장 사이에서 예쁘게 말라가고 있다.


 결혼하기 전에는 나름대로 서로를 기쁘게 하기 위한 선물을 고뇌하고 준비했다면, 결혼 후에는 대체로 서프라이즈가 사라지고 평소에 용돈으로 사지 못하는 값 비싼 물건을 요청해 선물 받고 선물한다. 예를 들면, 애플 워치나 특정 브랜드의 선글라스 같은 것들. 선물이 뭘까 기대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민하는 낭만은 사라졌지만 취향저격에 성공할 확률은 100%가 됐다. 결혼하고 첫 생일에 내가 그에게 요청했던 선물은 '커플 파자마'였다. 사실 잠옷이야 내가 사면 그만이지만, 그에게 생일 선물로 사달라고 한 이유는 남편도 나와 함께 커플 파자마를 입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기 위해서였다. 결혼하기 전 나름 신혼생활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커플 파자마였다. 그는 내 취향에 딱 맞는 잠옷을 골라왔지만, 함께 입는 로망은 지키지 못했다. 결혼 초부터 지금까지 흰색 반팔 티셔츠에 회색 반바지가 분신처럼 그의 몸에 붙어있다.


작년 겨울, 그의 크리스마스 선물.


 나는 이제 우리 사이에 선물에 대한 낭만은 거의 끝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난 크리스마스에 그가 내게 선물을 하나 건넸다. 두어 달 전, 삼청동으로 데이트를 갔다가 어느 소품점에서 파는 목걸이가 너무 예뻐 한참을 고민했다. 집에 와서도 그냥 그거 살걸 그랬다고 후회도 했다가 정말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두 달이 지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게 된 거다. 내가 갖고 싶어 했던 목걸이가 'You are my christmas(너는 나의 크리스마스야)'라고 적힌 카드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거를 언제 샀지? 계절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같은 제품을 팔고 있나? 아니면 가을에 이미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한 건가? 의문은 커져가는데 비밀이라고 입을 딱 닿는 남편. 그는 무엇이든 숨기질 못해서 프러포즈받을 때도 오늘 프러포즈하겠구나 예상하고 기다리게 했었는데, 이날은 너무 감동한 나머지 안 아프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충분히 나를 위해 고민했겠지만 취향에 맞지 않는 선물 보다, '나 이거 사줘' 요청해서 받는 선물 보다,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갖고 싶어 했던 물건을 몰래 선물해주는 게 가장 큰 감동을 준다. 그 물건이 비싸고 싸고, 구하기 어렵고 쉽고를 떠나서 사소한 한마디를 기억해줬다는 고마움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선물을 했을 때에도 가장 환한 미소를 봤을 때는 그가 원했던 고가의 시계를 사줬던 순간이 아닌, 그가 백화점에서 살까 말까 고민했던 옷을 내가 몰래 사다 줬을 때였다. 그러니까 아내 혹은 남편에게 선물을 해야 한다면, 평소에 그가 관심 있어했던 물건이 없었는지부터 최선을 다해 상기해보자.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 사소한 것을 기억해내지 못해 몇 배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순간들을 놓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감동에 빠진 배우자의 눈동자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이제 와서 분홍색 티셔츠라도 좋으니 그가 내 생각하며 사 오는 옷이 입고 싶은 걸까? 이 글을 빌어 대쪽 같은 취향을 가진 여자 친구 때문에 상처 받았을 36살 시절의 남편에게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다른 사람과 살고 있습니다>는 매주 일요일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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