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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랑 Oct 22. 2021

손에 쥔 무기를 내려놓을 때

우린 비로소 자유해진다


우리의 삶은 종종 정글에서 살아남기,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등으로 비유된다. 인생을 나타낼 수 있는 비유가 고작 정글과 전쟁터라니. 결국 양육강식인데. 암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인생은 이보다 우울하고 끔찍한 일 투성이다.


한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재벌3세의 갑질, 재벌가 아이의 운전기사를 향한 인권모독, 모 대학교 청소 노동자의 죽음, 아파트 경비원을 향한 폭행, 흔하디 흔한 기업 대표의 폭력, 인기 배우가 고용 직원들에게 행했던 이중성, 신인 배우를 향한 성상납 요구 등 기득권층의 행패를 다룬 뉴스는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 일상에 출몰한다. 평범한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극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사회로부터 얻은 것으로 개인의 이득만을 취하는 것을 넘어서 악을 정당화시키고 자신의 죄를 은폐한다? 드라마와 영화의 흔한 소재지만, 사실 이런 일은 공인이나 특별하고 자극적인 일을 다루는 뉴스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도 매우 흔해빠진 일이다.


학창시절엔 흔히 생김새, 어리숙하고 순한 친구, 자신보다 힘이 약한 친구를 왕따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또 요즘은 자신보다 환경이 어려운 친구를 괴롭히는 일이 다반사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식 이하의 요구를 한다거나 무엇을 등에 업었는지 내가 누군줄 아냐며 갑질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단다. 그뿐만일까. 직장 생활에서도 똑같다. 직속 후배를 괴롭힌다던지, 사회 생활을 잘 못하거나, 옷을 잘 못 입는 등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모자라보이거나, 남들보다 못하다 생각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따돌리는 이런 일들은 하나하나 예를 들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의 일상에 매우 흔한 일이다.


그래, 삶이 그리고 사회가 참으로 살기 어렵다. 한정된 재화로 보다 많이 갖으려고 하니 서로 싸울 수 밖에 없다. 최근 전세계에 흥행한 k-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줄거리만 봐도 그렇다. 그까짓 456억의 상금을 갖기 위해 서로를 죽인다. 상금은 단 한명이 쟁취할 수 있다. 그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빚이 있거나 경제적 위기에 처해있는 사람들이다. 대충 한명당 목숨값이 1억이란다. 그래, 웃자고 즐기자고 보는 드라마, 사회를 풍자를 한거고 감동도 있었는데, 뭘 그리 진지해라며 필자를 나무란다면 할 말이 없지만, 누군가의 삶같은 그 드라마는 소재와 지나치게 잔인한 묘사가 난무한 영상, 과정, 결과가 너무 끔찍하다. 시즌3까지 절찬리에 방영했던 펜트하우스도 마찬가지다. 돈, 명예, 권력, 아름다움,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들에겐 다른 사람의 목숨이 가치가 없다. 그러니 각종 범죄와 살인도 서슴치 않으며 자신과 자신이 누리는 세계를 지킨다. 그들은 피로 얼룩진 부귀영화를 점점 더 강하게 탐한다. ( 물론, 그것들의 흥행을 비판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만. )


아이러니하게, 요즘 우리의 대부분은 뉴스를 보며 기득권층과 갑질 하는 이들을 욕하고, 소비자가 되어 이런 문화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푼다. 그것을 관람하는 이들의 마음은 제각각이겠으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뇌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 돈이 없으면 안돼. 세상은 양육강식이야. 나와 우리 가족을 지키려면,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돈, 명예, 권력 등등등이 있어야 해. 사회와 각종 문화에서 강요하는 시스템에 우리는 숨막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것들이 말하는 가치에 부합되는 사람이 되려 애쓰고, 나를 죽이려는 정체가 불분명한 적을 먼저 죽일 수 있는 강한 자가 되기 위해 앞만 보며 치열하게 살고, 가난하고 곤고한 이들을 먼저 이 시스템의 희생제물로 바치며, 서로를 더욱 더 큰 절망의 늪에 빠뜨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어른들의 이런 행보에 아이들의 순수함까지 오염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지난 3년간 중, 고등학교 아이들의 꿈으로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이 어떠한 직업도 아닌 부자, 뭘 하든 상관없이 돈 많이 벌고 싶어요. 돈 많은 백수였다. 우리 아이들의 상태가 전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저 요새 아이들이 현실적인 것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꼭 부자가 아니여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우위에 서기 위해 소위 합당한 갑질할 수 있는 위치에 서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렇게 교육하고 있지 않은가. 좋은 직업이나 직위를 가지려 노력한다거나, 권력이나 명예를 가지려 한다거나,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지려 하거나, 좋은 대학을 가거나, 좋은 스펙을 만들려고 하거나.


언젠가는 누군가 나에게 연애에서도 갑과 을이 있다고 말했다. 어릴 땐 단순히 을을 더 사랑하는 쪽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며 을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강한 것들, 무기를 덜 가진 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돈이나 권력, 명예, 학벌, 집안, 외모, 직업, 젊음 등 눈에 보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끔찍한 사실 말이다.




나에게도 그런 부끄러운 시절이 있었다.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내가 가진 권력을 휘두르던 그런 시절. 난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30대 중반이 다 된 나이지만, 여중, 여고만 다니다 성인이 되니 눈에 띄는 외모 덕에 또래 친구들과 확연하게 다른 특이한 인생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땐 이게 특이한 건지도 몰랐다. 캐스팅을 당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연예인들에게 대쉬를 당하고, 유명한 이들의 소개팅이 들어오며, 다가오는 남자들은 소위 부자, 권력이든 명예 등을 이미 다 갖거나, 이루어 가고 있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얼마나 예뻤길래? 라며 나의 무기를 확인하고 자신이 권력을 줄지 말지 평가하려는 사람들이 당연히 생기기 마련인데. 정중히 사양하겠다.)


왜인지 영문도 모르던 순수한 시절, 그냥 내가 좀 예뻐서 그런가보다 했다. 너무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많아 남자란 존재에 흥미가 떨어졌다. 어느 지점엔 남자와 눈만 마주쳐도 날 좋아할까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다. 어쩐지 쓰면서도 좀 재수없지만, 사실이다. 아이돌이 전화로 매일같이 노래를 부르며 사랑 고백을 하고, 사귀지도 않는 나를 일년 넘게 쫓아다니며 자신이 다니는 호텔 피트니스 회원권이며 샤넬백이며 갖다 바치려는 흔히 말하는 다이아수저 남자와 만날 때마다 포르쉐, 페라리, 아우디 등 차가 수시로 바뀌는 회사 대표.특이한 경험을 이곳에 다 쓰기엔 글의 주제와 어긋한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무튼 이런 남자들이 주변에 주를 이루며 해바라기처럼 따라다니니 눈이 저절로 높아졌던 것 같다. 그들과 사회가 뭐 때문에 나에게 권력을 준지도 모르고, 참 순수했다. 세상물정 한참 모르는 나는 처음 만나는 남자와 결혼 할거라는 꿈을 안고 사는,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순정파였다. 그랬기에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진작 사랑을 뒤로 한 채, 남자들이 가진 것에 매력을 느껴 남들이 말하는 신분상승이나 했을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러다보니 남자는 나에게 마치 과일 가게에서 사시사철 파는 사과와 같았달까. 대부분 남자들이 비슷하니 그들은 나에게 귀찮으면 안 보고, 심심할 때 만날 수 있는 그런 존재정도였던 것 같다. 처음 만난 남자랑 결혼을 꿈꿨기에 스킨십에 질색했고, 그들은 나에게 털 끝하나 안 건드리고 너무나 예의바르고 깍듯했기에 굳이 사귈 필요도 없었다. 물론 그중 가끔 착하고 젠틀한, 만나면 즐거운 사람들을 꽤 길게 본적도 있지만 상대가 나와 더 관계가 진전되길 표하면 바로 관계를 정리했다. 그래 생각해보면 그들은 다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고 싶어서 그랬을텐데. 난 참 무관심했고, 정말 갑중의 갑, 지금 생각하면 꽤 별로였던 것 같다. 이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엄청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고, 알고나선 엄청난 후회와 반성을 거듭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나름 신념이 있어 돈이나 비싼 선물같은 물질적인건 절대 받지 않았다.) 무튼 그땐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어쩌다 한번 보면 연락 오는 셀 수 없는 남자들과, 어떻게든 엮여 보려는 남자가 너무 많아 그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생각보단 남자들은 외모만 보고 이런다며 색안경을 끼고, 편견으로 그들을 가볍게 대했다. 언젠간 내가 온몸에 화상을 입어도 너가 날 이렇게 좋아하겠냐며 지겹게 달라붙는 남자에게 무섭게 쏘아붙이기도 했다. 결국 그것도 어떤 의미론 갑질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를 줬을지 모른다.


그 뒤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성형으로 환골탈태 후 남자들에게 갑질을 하거나 신분 상승을 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외모가 변화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남자들에 대한 분노와 회의감이 가득했지만, 결론적으론 현실과 타협해 자신의 무기로 그것을 선택한 의존적인 그들은 자신이 애써 가진 무기를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고, 늘 불안정해 보였다. 어느 날은 성형 중독 같은 증상을 보이는 친구에게 고민하다 걱정하는 말 한마디를 던졌다가, 너는 내 마음을 절대 이해 못 한다며.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서운하기보다 사실 친구의 말이 충격이었다. 사실 그때의 나는 친구를 깊게 이해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친구를 걱정했지만 약간은 한심해 보였던 것 같기도하다. 역시나 내가 나의 무기를 내려놓지 않고, 내 입장에서 한 사려 깊지 못한 충고는 그 친구에게 되려 상처만 안겨 준 꼴이 되었다. 난 후에 친구 말의 의미를 깨닫고 너무 미안했고, 결국 반성과 사과로 끝났다.

  

이성을 향한 나의 의도치 않은 갑질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해하게 되며 반성과 함께 끝이 맺었지만, 그때까지도 그것이 나의 무기며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것이란 것은 잘 몰랐는데. 내 모습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무기였구나. 그리고 누군가는 나의 어떤 모습. 사람들의 과도한 친절을 당연시 받고, 특별한 대우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그 모습에 굉장히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었겠구나.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몇몇 친구가 가끔 농담으로 세상 모든 사람이 너에게 친절해.라고 말하던 그 의미, 토랑이는 사람들이 다 착한 줄 알 거야. 네 앞에선 모든 사람들이 착한 척해. 이런 말들이 아주 조금씩 이해가 되는 순간이 생겼고, 노력한 것 없이 당연하게 특혜 받았을지 모르는 내 인생이 조금 부끄러워졌었다.

 

나이가 들면서 피부관리, 시술 한번 받은 적 없는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딱히 꾸미는데 재능 없고 수수하게 하고 다니는 내게 예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극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물론 나이 드는게 가끔 아쉽기도 하고 우습게도 남녀노소 처음 보면 몇 년을 날 극찬해주던 그때가 아주 조금은 그리울 때도 있긴 하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때와 달리 이제는 칭찬을 들어도 기분이 너무 좋고, 관심을 받아도 너무 좋아졌다. 이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 무기가 되었을 땐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을 순수하게 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또 그때는 이상하게 사람들이 앞에서보다 뒤에서 칭찬을 더 많이 하고 날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얼굴이 마음따라 간다고 차가워보였나보다. 무튼 이젠 과한 칭찬과 관심이 아닌 사람들의 순수함이 좋고, 그게 때로 과하게 이어질지라도. 이젠 그저 감사하다.


인생의 방황기 어쩌다 겉모습 덕분에 시작하게 된 일로 강의까지 다니게 되었고,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지금, 학생들이나 사람들이 나를 보며 즐거워하고, 좋아하고 날 필요로 해주면 그것으로 참 만족스럽다. 나의 튀었던 부분이 이제 내 특별한 무기나 권력이 아닌 남들과 조금 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는 통로가 되었으니까. 앞으로 다른 사람들 위해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요즘의 나는 이걸 생각하느라 바쁘다. 그리고 나이 들어가고 있는 지금, 이제 무기가 아닌 도구만 남아 내 마음이 더 자유로워질 일만 남았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위에 쓴 것들뿐 아니라 양육강식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남보다 더 가진 모든 것은 무기가 된다. 우리의 삶은 무기를 하나라도 더 지니기 위해 경쟁하는 전쟁터가 될 것이고,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특별하고 특출난 무기를 갖기 위해 온 마음과 영혼을 쏟으며 인생을 허비할 것이다. 무기를 만드는 것에 인생을 허비하려면, 만드는 이유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단지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이기는 이 싸움을 위해 누군가로부터 날 지키기위해 만든다면, 꼭대기의 1등만 살고 우리 모두는 패배라는 죽음을 맞이 한다. 하지만 정말 더 슬픈 것은 1등조차 그 자리를 영원히 지킬 수 없다는 거다. 그렇게 결국 모두의 죽음으로 이어지겠지.


신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넘치게 허락할 때는 개인의 유익이 아닌 타인의 유익을 위함이라 한다. 또 우리가 타인과 다른 강점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함이라 한다. 내가 남들보다 많이 가진 것으로, 나의 강점으로 개인의 이득을 뛰어넘어 타인의 만족과 기쁨, 평안, 행복 나아가서 타인과 사회를 지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전쟁터에서 살지 않아도 되고, 그럼 더이상 무기는 필요 없어진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편의를 위해 만든 이 잘못된 시스템에 가난하고 곤고한 자들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나아가서 자신도 곧 죽을 이 전쟁의 참가동의서에 꼭 싸인을 해야 하는가.      


무기는 타인을 해할 수도 있지만,

잘 사용하면 타인과 사회를 지키는 도구가 된다.


무기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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