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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랑 Oct 21. 2021

누구에게나 올라야 할 산이 있다.

산을 오르며 삶을 배우다.


산을 좋아하는 남편을 따라 결혼 전 종종 산에 놀러갔다. 산 정상까지 오른 적은 없고 주로 중턱까지 갔다 내려오거나 아님 오솔길을 따라 걸어다니며 산책 수준으로 놀러가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날은 제대로 된 등산을 해보기로 했다. 첫 등산인지라 서울에 있는 산 중에 초보자들에게 적당한 인왕산을 목적지로 잡았다.


코스는 짧았지만 생각보다 오르막 길이 많아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이 첫 등산의 묘미를 맛볼 수 있게 해주었고, 등산을 같이 하는 것이 꼭 결혼 전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것을 연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로의 호흡에 맞추어 누군가 힘들 땐 조금 쉬었다가고, 필요할 때는 서로 손을 내밀어주고 잡아주며, 또 먼저 너무 앞서가지 않도록 서로를 기다리며 그렇게 각자 따로 걷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함께. 서로의 템포를 세심히 관찰하고 맞춰 걸으며 서로의 손과 발걸음을 의지하는 일이 꼭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인생 같았다.

   

한번도 올라보지 못한 산을 오르며 숨이 가빠지고, 정상이 안 보여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내 옆에 함께하는 남편의 존재가 위로이자, 나를 정상으로 이끄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어쩌다보니 코스를 잘못 잡았다.지름길이라 들었는데, 보통 사람들이 흔히 올라가는 길이 아닌 더 경사지고 험난한 길이었다. 한참을 서로에게 의지하며 정상을 향해 바삐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는데, 한적한 등산로 끝 저 멀리 이미 정상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 같은 사이 좋아 보이는 모자가 우리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하산하고 있었다.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정도로 꽤 어려 보였는데, 벌써부터 엄마와 함께 산을 오르는 것이 첫 등산인 나에게는 꽤 멋져보여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좁은 산길에 이르러 남편과 나는 모자가 먼저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모자가 우리 곁을 지나는 순간, 예상치 못한 광경에 깜짝 놀라 남편과 나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 둘이 한참을 내려가 우리의 시야 끝에 다다르자, 내가 본게 맞은지, 남편이 본게 맞은지 서로 조용히 확인했다. 놀랍게도 아이는 시각 장애를 가진 아이였다. 저 멀리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자를 바라보며 왜인지 눈물이 났다. 그것은 연민도 긍휼도 아닌 숭고함이었다. 모자를 몰래 한번 더 본 것이 꼭 누군가의 생존 결투 현장을 엿 본 느낌이 들어 잠시나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는 재미 삼아 해보는 것들, 어쩌면 너무 쉽게 느껴져 흥미가 떨어져 하지 않는 것들, 또는 당연해서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의미없는 것들이 누군가에겐 생존이 달린 문제이자 아픔이고, 하나하나 헤쳐나가야 할 높은 허들이겠구나, 그게 피부로 느껴지자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감사하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단 생각이 들어 어깨가 무거워졌다.


아마 어머니는 아들의 상태를 듣고는 지금 아들이 겪는 아픔을 보다 먼저 몇 배로 겪으며 아들을 위해 견뎠으리라. 그렇게 강해진 어머니는 거칠고 험한 세상을 아들에게 잘 적응시키고 상처받지 않고 잘 살아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지보다 험한 산을 오르고 내리는 훈련을 시킬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어머니의 사랑과 그들의 강인함이 내 마음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가슴이 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이 이 험난한 세상을 무탈하게 해쳐나가기를 산을 오르며 기도하는 것이었다. 소년의 아픔을 자신의 삶처럼 여기며, 그의 발에 맞추어 한 발자국 먼저 걸어주는 이가 있기에 앞으로도 소년은 꿋꿋하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잘 살아갈 것이다.


우리도 누구에게나 올라야 할 산이 있다. 그것은 대학 입시일 수도 있고, 취업일 수도 있고, 국가고시나 사업,새로운 진로일 수도 있다. 인생에 존재하는 많은 산을 오르는 일처럼 산을 오르는 것은 정직한 과정이다. 땀을 흘리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만큼,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만큼, 정상에 아주 조금씩 가까워진다. 필자만 그런건지. 중간쯤 아니면 정상을 몇미터 안 남기고 더 이상 못가겠어. 포기! 라고 외치고 싶은, 기력을 다하는 순간도 꼭 온다. 하지만 그때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감고 호흡을 몇 번 가다듬으면, 금새 더 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아니면 처음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그 과정이 조금은 고단할지라도 힘든 고생길이 아닌 서로를 끈끈하게 만들어줄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중간에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정상까지 가게된다.


우리의 인생과 비슷해서 그럴까. 정상에 도착하면 충만한 쾌감이 온 몸을 감싼다. 소리를 질러 온 세상에 내 존재를 알리고 싶다는 부끄러운 충동이 내면에서 마구 날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정상에서 서서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경치를 바라보며 맛보는 성취는, 몇 배로 더 달다.


그렇게 인생의 희노애락을 배우며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걸어 정상에 올라섰다가, 시원한 마음과 섭섭한 마음 모두 미련없이 뒤로 하고 함께 웃으며 정답게 내려오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른 동기를 가지고 오르는 산은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좋은 친구같았다. 나 또한 인생에서 거대한 산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동안 걸어왔던 길들이 나에게 바른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이다. 등산과 인생길을 걷는 것이 어딘가 묘하게 참 닮았다.


험난한 산을 오르는 일은 혼자보단 둘이 낫다.

산은 내려오는 일은 오르는 일보다 편하고 쉽지만,

정상을 향해 오르는 일은 내려가는 일보다 몇배의 보람과 성장을 안겨준다.


산은 치열한 생존을 위한 배움터이고, 둘에서 하나가 되는 오작교이며, 스스로와 싸워 이겨 인생의 또 다른 산을 오르는 것을 연습하는 전투장이다.



산을 오르내린 우리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한뼘 더 자랐다.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서로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았다. 함께 인생의 많은 산을 올라보자.

그건 분명 즐거운 여행이 될거야.


당신이 눈 앞의 산을 두려워하지 않길 바라며.


중간에 포기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든 정상까지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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