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나몬라떼 Oct 30. 2022

상상속의 세계

지금 돌아보는 나의 어린일기 #8

한강에서 열렸던 '멍때리기 대회'가 화제였던 적이 있다. 어떤 식으로 심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멍을 때린다는 것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그 자리에 있는다는 건데, 생각이 많은 나로서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멍을 때리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무언가를 보고있으면 계속 다른 것들이 연상되어 떠오르고, 있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해 내기 일쑤다. 특히 누군가와 대화하지 않고 혼자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어렸을 때 가만히 앉아 머리 속으로 어떤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나의 취미 중 하나였다. 몸은 책상에 앉아서 아무것도 없는 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정말 갖가지 그림을 그려댔다. 아주 어렸을 때는 10대가 된 나, 꿈을 이룬 나를 상상하고, 읽은 책의 주인공을 만나는 것, TV에서 본 곳에 여행 가는 것, 그 날 아침 꾸다가 깬 꿈의 뒷이야기를 상상하기도 했다. 조금 더 커서 5, 6학년이 됐을 때는 좋아하던 연예인과 만나는 것, 어른이 되어서 누군가와 연애하는 장면까지 그렸다. 그 날 다 끝내지 못한 상상은 다음날 이어서 하기도 할 정도로, 그것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였다.

2004. 2. 20. 9살 때의 일기 / 2007. 9. 9. 12살 때의 일기

여기에 소개하지 않은 일기 중에는 5학년 때 내가 직접 일기장에 쓴 '끝없는 이야기', '점등인'이라는 제목의 짧은 소설도 있다. 읽어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내용이긴 하지만 은근히 재미있다. 심지어 '끝없는 이야기'는 3편 정도 연재를 마친 후 작가의 말씀이랍시고 인터뷰 형식으로 일기를 쓰기까지 했다. 그 자체로 내가 얼마나 상상을 많이 해댔는지를 잘 보여준다. 내 일기장을 읽었던 담임 선생님들은 얼마나 재밌었을까?


열심히 갈고닦은(?) 나의 상상력은 다양한 방면으로 쓰였다. 중고등학생 때는 상상력을 통해 얻은 스토리텔링 능력으로 빈 공책에 소설을 쓰기도 했다. 특히 고등학생 때 틈틈히 썼던 소설은 장르가 범죄/추리와 로맨스를 섞어놓은 것이었는데, 에피소드 하나를 쓸 때마다 친구들이 공책을 가져가 돌려 읽었다. 선생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친구들은 야자시간에 내 소설을 몰래 읽고, 마치 댓글을 남기듯 포스트잇에 감상평을 적어서 붙여놓았다. 선생님들께 들키지 않도록 공책 표지에는 '미적분과 통계 기본', '화법과 작문 II'이라고 적었다. 야자 감독 선생님들이 공책 내용을 보셨다면 깜짝 놀라셨을텐데... 지금은 이 노트가 어디로 갔는지 없어서 매우 유감이다. 수능 공부하느라 완결을 내지 못해서 많은 친구들이 아쉬워했던 작품인데.


내 머리속에서 모든 것은 상상의 씨앗이 될 수 있었고, 씨앗이 한 번 발아하기 시작하면 나는 등장인물들과 배경까지 꼼꼼하게 설계했다. 혹자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재미난 놀이 덕에 현실 감각은 없어도 창의력은 키울 수 있었다. 대화를 하다가 그 때 그 때 드립을 날릴 수 있는 것도 상상력이 풍부하기 때문 아닐까? 




어른이 된 지금도 엉뚱한 상상을 많이 한다. 동생은 나를 1절, 2절을 모르고 8절까지 하는 언니라고 하고 친구들은 '절대 한 숟갈만 더 얹지 않고 세 숟갈 네 숟갈 더 얹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처럼 몇 숟갈 더 얹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는 안드로메다까지 가기 일쑤다. 지금 일하고 있는 팀의 팀원들은 모두 MBTI의 두 번째 자리가 N(Intuitive 직관형, 상상력이 풍부함)인데 이에 걸맞게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회의만 하면 주제가 뻥튀기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고, 회의가 끝날 때쯤에는 "저희 이거 다 할 수 있는 건가요?"라는 말이 꼭 한 번씩 나온다. 현실적인 사람들이 보면 바쁜데 회의에서 공상하느라 시간 버리는 것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난 이 방식이 꽤나 마음에 든다. 소위 말하는 '아무말 대잔치' 속에서 빛나는 아이디어들이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상상했던 일을 실제로 해냈을 때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멋진 경험이다. 아무말 대잔치를 해도 귀담아 들어주는 우리 팀원과 회사의 분위기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어릴 때에 비하면 상상력이 줄었다. 이제 그 때 상상했던 일들을 대체로 겪어봤기 때문일까. 대학생 때 해외로 배낭여행을 가서 그토록 열심히 상상했던 베르사유 궁전에도 가봤고, 저 당시 좋아했던 연예인의 콘서트도 가봤으니. (연예인과 사귀는 상상도 해봤지만 그건 못했다.) 머리 속의 도화지가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다. 옛날에는 경험한 것보다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 더 많았기 때문에 가능성이 더 많았지만, 지금은 그 중 많은 것을 경험해 본 바람에 상상할 수 있는 주제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 현실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딱히 상상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도 한 몫한다.


그래도 나는 고작 27년 산 초짜 어른이니까, 100세 시대에 앞으로 70년 넘게 남은 시간 동안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많은 일들을 겪게 될 것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틈이 날 때 남은 여생에 경험해 보고 싶은 것들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은 충분히 영양가 있는 행동이라 본다. 계속해서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모습을 그려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 또 언젠가 그것들을 이룬 나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내가 얼마나 상상을 많이 했는지 보여주는 일기들이 정말 많은데, 아래 두 편을 추가로 더 소개한다.

2005. 9. 22. 10살 때의 일기 / 2004. 2. 16. 9살 때의 일기


이전 07화 친구, 되기는 쉽고 끊기는 어렵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