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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댓츠올 Jul 24. 2023

사람, 좋아하세요?

‘원래’ 그런 건 없다

한때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십 대 시절, 사춘기를 지나면서 어느 순간 말수가 줄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들을 열심히 읽었는데 그 속에는 왠지 음울하고 고독하며 우수에 찬, 어쩐지 ‘델리킷’해 보이는 인상의 캐릭터들이 종종 등장하곤 했다. 그리고 그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멋있었다. ‘오, 괜찮은데?’ 하며 나 또한 그들을 따라서 우울의 늪으로 함께 침잠하게 되었는지 아니 어쩌면 태생이 그런 성격이었을지 모르겠다. 선천이든 후천이든 어쨌든 그건 앞으로의 내 성격 형성에 일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학기 초반, 친구들과 어울리기는 쉽지 않고 성격 좋은 친구들이 말을 붙여오면 그때서야 조금씩 형성되는 관계마저도 이어가기 어렵다고 느껴질 무렵,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애써 누군가와 친해지는 어려운 일을 꼭 해야 할까 의구심마저 들었다. 

‘아 이거 되게 싫다(혹은 거북하다).’

그때 나는 처음 보는 사이에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나누는 이야기들이 어색했고 어떤 답이 적절한지 몰랐고 골똘히 생각해서 한 말들은 돌아서 생각하면 구질구질해서 후회했다. 나는 멋있는 말만 하고 싶은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너무 평범해서 부끄러웠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귀찮고 어려운 일을 피하고 싶은 합리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쉬워지는 것들이 참 많다. 대화를 나누다 맥이 끊기고 어색해지면 대화를 이어가는 대신에 ‘난 원래 말수가 적어’ 하면 되고, 흐르는 침묵 속에서도 ‘나는 원래 침묵이 편해’ 하면 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모임에는 굳이 참석하지 않으면 되고 불편하면 만나는 횟수를 줄이면 된다. 그렇게 나는 프로불참러가 되었고, 그러고 나면 어느 순간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스스로 정의한 대로 ‘원래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게 된 건, 사회에 들어와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회사생활을 하면 좋든 싫든 생활반경에 여러 사람들이 들어오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의 생활 속에 들어갔을 테다. 단지 일을 하려 모인 것뿐인데 미지의 인물들을 서로의 삶에 초대하는 것이다. 안방 깊숙이 들이지는 않더라도 응접실에서 다과 정도는 해야 한다. 내가 미지의 인물에게 겁을 먹듯 다른 사람들 또한 좋든 싫든 나를 대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난 원래 침묵을 편안해해” 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될 것만 같다. 결국 일이 되게 하는 이야기들을 풀어내야 하고 그 사이사이에는 서로를 너무 불편해하지 않은 정도의 친밀함도 다지는 것이 사회생활인 것만 같다.


매일 만나는 회사 사람들도 있지만 협업을 하기 위해 가끔 만나는 미팅 자리도 종종 있었다. 얼마나 자주 보게 될지 확신할 수 없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첫 만남인 자리들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왔다. 특히 첫 미팅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너무 긴장해서 선배의 옆에 붙어서 반의반의 반 정도 슬쩍 뒤로 물러난 채로, 그렇게 하면 내가 어딘가에 가려지거나 존재감이 희미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약간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약간 흐리멍덩한 무드를 유지하며 반투명되는 기술을 써볼까 하다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맨들맨들하게 웃고만 있었을지도. 그러나 차를 마시고 이야기가 점차 진행되면서는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이 너무 흥미롭고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샘솟고 또 앞으로 하게 될 일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반의반의 반 정도 뒤로 물러나 있던 몸은 조금씩 앞으로 기울어지고 1인칭 시점이라 모르겠지만 눈도 아마 반짝반짝 빛났을 것이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오십 개쯤 생겨나고 그중에 무슨 말을 할지 좀 고르다가 끼어들어보기도 하는 시간도 있었다. 골라낸 말도 딱히 멋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냥 괜찮았다.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선배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내 다정했던 작가와 아직 뭐라고 말을 덧대야 할지 모르면서도 끼어들고 싶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던 신입. 이렇게 세 사람의 기류가 적당히 잘 조성되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거 정말 재밌네. 나 왠지 말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하하.”


그때의 감각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있다 정도였고, 사람이 좋다는 생각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팅을 하는 일은 거듭 생겨났고 나는 그 시간들이 참 좋았다. 좋았던 일도 있었고 좋지 않았던 일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좋았다. 그들에게도 내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호기심의 뚜껑이 펑하고 열려서 자꾸 관심을 기울이고 들여다보게 되는 상황은 꽤 자주 일어났다. 내 생각을 또렷하게 말할수록 상대방도 선명한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주고받으며 무언가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 행복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난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 아니었고 침묵을 편안해하지만 깊은 대화도 더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사람을 만나고 나면 기가 빨리면서도 묵직하게 받은 남의 이야기에 든든한 에너지가 솟아오른다는 것을.


한때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뭘까 궁금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혹시 사람 좋아하세요?” 하고 대뜸 묻고 다닌 적도 있었다(놀랍게도 진짜다). 느닷없는 질문에도 사람들은 침착하게 자기 생각을 들려주었다. 어떤 대답을 들어도 기꺼웠다.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항상 고민을 거듭하기 때문에, 의외로 고민 없이 바로 “좋아하죠!” 하고 말한 단단한 대답도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만 말하면 대화를 엄청 잘하는 사람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심심풀이 땅콩처럼 수북이 쌓인 껍질 같은 말속에 조금의 알맹이 같은 말이 있다. 또 어딘가에 업로드된 ‘일 못하는 사람의 특징’ 같은 게시물에 내가 저질렀던 사례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걸 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어쩌겠나. 모두가 완벽한 일을 할 수도 없고 어느 정도 선에서는, 상대방의 배려와 아량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 사이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적인 자리에서나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으레 하는 첫인사. 그 이후에 나오는 말들은 실시간임에도 머릿속으로 공글리고 매만진다. 가급적 평범한 이야기만 하고 싶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왠지 겉도는 느낌이고 그렇다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서로 내밀한 이야기만 펼쳐주길 바랄 수도 없으니까. 자연스럽지 않은 그 과정을 건너고 나면 어느 틈엔가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지게 된다. 그 편안한 시기를 맞이하기까지 머릿속은 쉴 새 없이 바쁘게 굴러간다. 그다음에 해야 할 말, 그다음에 해야 할 말, 그리고 또 그다음에 해야 할 말. 대화 속에서 가끔 침묵이 찾아올 수 있을 텐데도 그걸 견디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때문에 가장 처음에 데면데면한 채로 약간은 낯을 가린 채로 앉은 둘 사이에 한 마디 두 마디씩 드문드문 이어가는 그 과정이 참 좋다. 내가 머리를 짜낸 질문들은 하잘것없이 느껴지는데 상대방이 불쑥 건네는 말들은 왜 크게 따뜻하게 다가오는지. 얼마 전에도 식사를 하다가 상대방이 전에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하고 “그때 시작한 일은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하며 말을 걸어준 일이 기억에 남는다. 마침 이런저런 일들과 그로 인해 느낀 생각들이 있어서 그 말을 시작으로 또 한참 뜻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돌아오는 길에 좋은 에너지가 샘솟는다. 그 탄성으로 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내 연락해 안부를 묻고 만나자고 청한다. 요즘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처음 만나는 사람들보다는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과의 교류가 더 잦다. 하지만 불쑥 물어봐도 흔쾌히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나면 또 예전의 나로 돌아와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며 마음속의 지반을 솎아내고 평평하게 다진다. 그건 어쩌면 내가 본능적으로 내 에너지를 조절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 ‘좋다’ 혹은 ‘싫다’ 두 가지 감정으로 양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세상사는 생각보다 스펙트럼이 촘촘해서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내게 온 이 ‘사람을 좋아하는 시기’를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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