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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SS Oct 05. 2023

할머니, 늙은 밥 말고 새 밥 주세요!

캐나다에서의 영어, 불어 그리고 한국어


이민올 때 큰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오기 전 한국에서 집 근처에 있는 원어민 영어 학원을 두세 달 다니고 왔으니 알파벳 배우고 간단한 영어 문장 몇 마디 하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캐나다의 새 학기는 9월 첫 주에 시작하지만 911 사태로 늦어진 랜딩 일정 때문에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등교를 시작할 할 수 있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다니기는 조금 먼 거리여서 스쿨버스를 이용해야 했는데 아이가 처음인지 무서워해 며칠간 렌트한 차량으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등교 첫날 함께 학교에 왔지만 담임 선생님에게 아이를 맡기고 돌아가는 아빠 엄마를 교실 창밖으로 보며 울음을 참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아련히 남아 있습니다.


그때 마음속으로 이 말이 아이에게 전해지길 바랐습니다.


'힘들겠지만 꼭 견뎌야 한다.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영어가 서툰 아이를 위해 다행히 학교에서는 소통을 도와주는 친구를 곁에 도록 해주었습니다. 아침에는 근처에서 스쿨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가 서는 곳으로 아빠나 엄마와 함께 가면 되지만 하교 시에는 학교 운동장에 여러 코스로 출발하는 스쿨버스들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어 자신이 버스를 잘 확인해야 합니다. 번호나 색깔별로 구분되어 있어 실수하지 않고 타고 와야 한다고 아이에게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의 학교 생활이 지나고 크리스마스 브레이크가 되었을 때 우연히 듣게 된 큰아이와 친구의 전화통화에서 영어 말하기는 엄청나게 발전했고 이미 굴러가는(?) 발음으로 바뀐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한국어를 쓰지 않으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 한글 공부를 시키고 한국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이 뼈아픈 후회로 남아 습니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작은아이는 어떻게 언어를 배우게 되는지 궁금했습니다. 부모는 한국어이야기하고 티브이와 비디오에서 즐겨 보는 어린이 프로는 영어로만 보고 들리는 것이 혼란스러웠는지 말을 배우는 속도가 큰아이와 한국 평균의 아이들과 비교해서 더딘 것 같았습니다.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자 당시 프렌치 이머젼 (French Immersion) 고등학교에 다니던 큰아이의 강력한 주장으 집 근처에 있는 프렌치 이머젼 주니어 킨더가든 (Junior Kindergarten)작은아이를 입학시켰습니다. 당시 아이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주소로 정되는 홈스쿨이 아닌 본인의 선택으로 프렌치 이머젼 스쿨을 지원하여 다니고 있었습니다.


2023 French Immersion Application (출처: TDSB)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부모가 불어까지 잘 봐줄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앞섰지만 문제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아이의 장담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며 집에서 있는 시간보다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집에서 혼자 놀면서 유치원에서 불어로 배운 동요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 년 뒤 프렌치 이머젼 시니어 킨더가든 (Senior Kindergarten)으로 갔고 그 뒤 프렌치 이머젼 퍼블릭 스쿨 (Public School)에 1학년으로 입학했습니다.


프렌치 이머젼 스쿨은 1학년에서 4학년까지 불어사용해서 모든 수업이 이루어지고 5학년부터 6학년까지 2년 동안은 영어로 하는 수업과 혼용하게 됩니다. 퍼블릭 스쿨 졸업 후 2년간의 중학교, 4년의 고등학교 모두 프렌치 이머젼 스쿨을 졸업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받아오는 성적표만 보고 '불어 성적이 괜찮구나'하고 혼자 생각했지 불어 공부하는 것에 해서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작은 아이가 6학년 때쯤 가족여행으로 나폴레옹이 어 난 프랑스의 코르시카 (Corsica) 섬과 모나코 (Monaco)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코르시카 섬에 도착해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한 오래된 화랑에서 마음에 드는 미술 작품을 발견하였습니다. 사고 싶은 마음에 화랑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데 영어로 대화가 통하지 않아 답답하던 중 와이프가 작은아이에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아빠대신 불어로 좀 물어봐 줄 수 있니?"

"... 그러지 뭐"


대화가 통하지 않아 궁금하던 질문을 작은아이를 통해서 하게 되자 주인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결국 원하는 그림흥정 끝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림 값 계산을 하는 동안에도 작은아이와 주인과의 대화는 계속 이어져 우리 부부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다 마침내 작별인사와 함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마 동양인들이 잘 방문하지 않는 프랑스의 외딴섬에서 동양인을 보는 것도 신기했을 텐데 불어로 말하는 아이에게 더 놀랐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궁금해서 작은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길었어?"

"처음에는 아빠가 물어보는 질문을 했는데 나중에는 나한테 많이 물어봐. 어디서 왔니, 불어는 어디에서 얼마동안 배웠니, 이것저것"

"캐나다에서 태어나서 학교에서 배웠다고 했는데 프랑스 불어와는 좀 다르다고 하네"

"그래? 어떻게 다른데?"

"발음, 말(단어), 표현 중에 요즘 안 쓰는 것들이 많데"


Corsica Calvi의 레스토랑 Santa Maria


아! 그렇구나. 캐나다의 몬트리올이 프랑스의 파리 다음으로 세계에서 2번째로 불어를 사용하는 큰 도시이고 퀘벡(Quebec) 주가 불어권이고 온타리오(Ontario) 주의 오타와(Ottawa)에서도 연방정부와 의회가 위치한 까닭에 영어와 혼용해서 불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프랑스와는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던 관계로 아무래도 사용하는 언어와 표현의 차이가 생긴 것 같았습니다.




큰아이가 가지고 있는 한국어에 대한 문제점을 알고 겪어보았기에 작은아이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1주일에 한번 토요일 한글학교에 다니게 하였습니다. 비록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4시간의 수업을 통해 한글을 읽고 쓰고 친구들과 말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캐나다에 오신 모님과 어릴 때 몇 년간 함께 지냈던 작은아이는 할머니와의 대화와 인터넷으로 시청하는 한국방송(주로 사극, 드라마)을 통해서 한국어 실력이 많이 었습니다. 그때 배우면서 쓰던 어눌한 한국말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할머니, 늙은 밥 말고 새 제발 주세요!

(Grandma, please give me new cooked rice, not old one.)


이렇게 성인이 된 작은아이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영어와 불어를 하면서 한국어로도 말하고 읽고 쓸 수 있는 Trilingual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대학을 지원하면서 오타와와 몬트리올에 있는 대학에서는 프렌치 이머젼 스쿨을 졸업한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학비면제와 많은 장학금을 제시하는 등 공용어인 영어와 불어의 Bilingual을 아직도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 글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Bilingual을 요구하는 캐나다 연방공무원 특히 Canada Revenue Agency (국세청)에는 이민자들 중 베트남 출신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캐나다정부의 기본적인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의 배려도 있지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까닭에 정규 교육을 받고 불어를 할 줄 아는 베트남인들도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미국으로 이민 온 분이 한국의 신고 맛이 그리워 몰래 씨앗을 가져와 미국의 자기 집에 심고 열매가 열릴 때까지 몇 년간 정성으로 배나무를 키웠습니다. 마침내 배가 열리고 맛을 보았더니 신고배 맛도 아니고 미국배 맛도 아닌 이상한 맛이 되었다며 신토불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큰아이는 어린 나이에 캐나다에 와서 자랐고 작은아이는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의 성향 탓일까요 아니면 주어진 환경 탓일까요. 아이러니하게 큰아이는 점점 더 캐나다인으로 불려지기를 원하지만 김치와 삼겹살을 정말 좋아하고 7080 감성으로 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을 즐겨 듣는 작은 아이는 겉모습에서부터 뼛속까지 한국인입니다.


아직 미혼이지만 아이들이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저와 와이프는 가능하다면 한국인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세월이 흘러 우리 부부가 세상에 없더라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자기 자녀들에게도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과 한국의 문화와 음식을 계속 이야기해 주고 전해주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전면 이미지 (출처: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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