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한 것들 : 봄, 꽃, 달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미스터 선샤인>에서 변요한(김희성 역)은 뜬금없이 이 말을 자주 했다.
" 난 이리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봄', '꽃', '달', "
아쉽게도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는 그 말은 그저 무용한 말일뿐이었다.
하지만, 그 드라마를 보고 있던 나에게는 아주 귀에 쏙 들어왔다.
나 또한 그리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니까.
나는 특히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특유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대지의 녹는 기운을 좋아한다. 매서운 바람이 분다고 해도 그 속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차가움이 있다. 그때의 대지는 얼었다 녹았다, 갈피를 못 잡는 와중에도 어느새 스윽, 겨우내 꼼짝하지 않고 있던 나무들에게 수액을 타고 올라가 저 높이 있는 잔 가지들에도 봄의 온기를 전해준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봄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계절의 변화를 몽땅 알아채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봄에는 뭐니 뭐니 해도 꽃이다.
봄바람이 불면 옷차림이 얇아지고 화사해진다. 세상에도, 내 마음에도 꽃바람이 분다.
그리고 나는 이때부터 작은 다발의 꽃 선물을 받기 시작한다. 딸아이는 늘상 내게 들꽃들을 따서 나에게 선물이라며 내민다. 알록달록, 야무지게도 따서 손에 꽉 쥐고 있다 픽업을 가면 내게 바로 건넨다. " 자, 엄마 선물! " 하면서 건넨다.
그리고 어떨 때는 사물함이나 잠바 주머니에 넣어뒀다, 시들어진 꽃을 내게 무심히 건네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셋 중에서 아무래도 "달"이다.
지금 사는 집은 달이 뜨면, 커튼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어 거실을 은은하게 비춘다.
나는 달빛이 참 좋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나는 양의 기운보다 음의 기운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달을 보고 있으면 마음을 치유받고 충전 돠는 느낌이 든다.
결국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간다. 맞은편 동의 대부분의 집은 밤 10시경에는 벌써 소등하고 깜깜하다. 대부분의 회사가 일찍 시작하는 곳이라 그마저도 나는 고맙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달빛을 받아들인다. 따뜻하게 밝은 별들과 달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바로 앞의 사람들만 하릴없이 바라보다 하늘을 보니 너무나 고요한 가운데 아름답다.
밤공기는 적당히 차가워서 나는 이 분위기를 참 좋아한다.
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에게 해를 따 줄게"라는 말을 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밤하늘의 별과 달을 따줄게"라고 한다.
아마도 그건 은은해서 그러지 않을까 싶다.
해는 너무 강렬하고 뜨겁다.
하지만 달빛은 은은하고 따뜻하고 아무리 봐도 눈부시지가 않다. 그리고 가끔 숨바꼭질하기도 하고 변장도 잘한다. 매력이 넘친다.
내가 밤길을 걸으면 달은 꼭 나만 쫓아오는 것 같다. 내가 차를 타고 빨리 달려도 달은 저 멀리서 빙그레 웃으며 나의 위를 살며시 비춰준다.
나는 은은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화려한 사람보다 소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무렇지 않게 식탁 위에 툭 꽂은 들꽃 한송이에도 배부른 사람이 되고 싶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달처럼 은은하게 들꽃 향이 풍기는 봄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릴 적 보름날이 되면 미리미리 오곡밥과 보름나물을 준비해 놓고 동네 아지메들은 마을 동산 위에 올라갔다.
둥근달이 떠오를 동쪽 바다 위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어도 꼭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친다.
누군가가 먼저 달을 처음 봤다고 외치면, 우리는 아쉬워하며 절을 두 번 하고 두 손을 꼭 모아서 소원을 빌었다.
어릴 적 내 첫 번째 소원은 "남북통일"이었다.
너무 거창했지만, 나는 달에게는 그런 전 인류적인 소원을 빌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나는 너무 예쁜 달을 보면 어릴 적처럼 절을 두 번 하고 두 손 모아 소원을 빈다.
눈을 뜨면 내 옆에는 나와 같은 자세를 한 아이가 서 있다.
그리고 싱긋이 웃는다.
"엄마, 우리 가족 건강하고 행복하라고 빌었어"라고 말한다.
그래, 엄마의 소원도 너희들과 같단다.
하나밖에 없는 이 달이 내일 밤에는 나 대신 한국에 있는 나의 엄마, 아버지에게도 따뜻하게 오래오래 비춰줄 거로 생각하니 달이 더 친근하다. 꼭 나와 가족들 간의 매개체가 된 것 같다.
이제 달은 나의 달이 된 것만 같다.
깜깜한 밤, 나만이 보면서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달이 좋은가 보다.
온 지구 사람들에게 다 비춰줘도 그 달이 꼭 내 것인 것처럼, 나에게 내어주니까.
그 유용한 달을 보면서 나는 가끔 무용한 짓을 할 때가 있다.
어제 발견한 재미있는 드라마 프로그램을 재생한다. 아직도 봐야 할 회차가 많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깜깜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 되었고 갑자기 하늘은 밝아졌다.
내가 여러 편의 드라마를 보는 동안 온 우주는 동쪽 하늘에서 남쪽 하늘 높이까지 이동했다.
나는 소파 위에 그대로인데, 몇 시간 째.
머나먼 신비한 우주는 내게도 훤히 보일만큼 하늘의 길을 가고 있는데, 새삼 내가 뭐 하고 있나 싶다. 잠도 안 자고.
내일 아침에는 피곤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지도 못할 텐데. 나의 아이들에게 또 사소한 일로 짜증을 낼 수도 있는데.
그래도 잠 안 자고 바라보는 달빛이 나는 참 좋다.
지금 지구에서는 이 난리가 나도 저 달은 여전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다.
그저 자연의 섭리대로, 그저 우주의 이치대로.
유용한 달을 보면서 무용한 시간을 보내던 내게 달은 슬쩍 잠자리로 등을 떠민다. 밝아오는 새 날에는 유용한 시간을 보내라고.
내일은 낮 하늘의 눈부신 '해' 도 좀 바라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