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줍는 아이

작은 아이가 산 속에서 밤을 줍는다.

by Jane Anne


줄무늬 다람쥐 한 마리가 밤송이를 들고 나무를 타다 그만 떨어뜨리고 만다. 나는 잽싸게 떨어진 쪽으로 간다. 다람쥐가 반쯤 벌려놓은 밤송이를 손쉽게 마저 벌려서, 반들반들한 밤을 낚아챈다. 나무 위의 다람쥐는 언제든 내가 떠나면 아래로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다, 저만치 쪼르르 가버린다.
어떨 땐 두발로 잡고, 열심히 갉아먹고 있다가 나무 위에서 놓칠 때가 있다. 내가 다람쥐라도 대개 황당할 것 같다. 나와 다람쥐의 눈이 마주친다. 그 밤을 주워서 직접 건네주고 싶다.
조용한 그 산에는 나와 다람쥐가 긴박한 눈치작전을 펴고 있다. 나는 땅 위에서, 다람쥐는 밤나무 가지 사이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가끔은 살금살금 땅으로 내려와 수색작전을 편다. 그러다 발기척이 들리면 나무 뒤로 숨었다가 잽싸게 나무 위로 올라탄다.


어디선가 바람이라도 살포시 불어오면 잘 익은 밤이 하늘에서 '후두두' 떨어진다.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을 들춰내면 거기에 진한 암갈색의 밤이 말간 얼굴로 있다. 주머니에 옮겨 담는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친 다음날에는 밤을 주우러 간다.
나에게 꼭 맞는 잠바 주머니는 모든 밤을 담을 듯이 넓었고, 불쑥 튀어나온 알밤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밤새 쉬가 마려워 뒤척이다, 겨우 하늘이 푸름스럼해지는 새벽녘이 다 돼서야, 용기를 내어 마당으로 나왔다. 대문 쪽을 마주 보는 재래식 화장실까지는 겁이 나, 차마 가지도 못한다. 마당에 엉거주춤 서 있는 나는 별을 보았다. 그 시각, 온통 짙은 파란빛으로 물든 투명한 하늘에는 정말 예쁘게 반짝이는 큰 별, 샛별이 있었다. 그때 마주한 빛나던 별은 지금도 가슴속에 그대로 박혀 있다.

다시 가벼워진 몸으로 미닫이문을 열려던 나는 동네 산속에서 희미한 플래시 불을 봤다. 산속의 밤나무는 정해져 있고, 집마다 아이들은 많아서 밤을 줍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다. 윗집에 사는 동네 언니가 새벽부터 밤을 주우러 갔나 보다. 오늘은 언니들보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 가봐도, 조금 줍기도 어렵겠다. 차라리, 욕심꾸러기 넷째 언니가 숨겨놓은 보물 장소를 찾아보는 게 낫겠다. 티 안 나게 한 두 개만 꺼내먹으면 미리 개수를 세워 놓았더라도 시치미를 떼면 된다. 다시 따뜻한 이불속으로 들어가 가벼운 마음으로 새벽잠을 이어 잔다.




우리는 다람쥐처럼 작은 이로 딱딱한 껍질을 1차 벗겨내고, 떫은 속껍질을 오물오물 뱉어냈다. 울퉁불퉁해진 엷은 노란색의 생밤을 오도독 오도독 씹어먹었다. 한 알을 먹기 위한 그 수고스러움은 당연한 거였다. 잠깐의 행복을 만끽한 후, 언니와 나는 다시 생밤을 집어 들고 그 작업을 반복한다.

엄마는 시집올 때 해온 재봉틀을 굴려서 천주머니를 만들어 놓으셨다. 시장에서 사 온 밤을 넣어서 화단의 땅 속에 파묻어 놓으시고는 긴긴 겨울밤, 한 번씩 꺼내 삶아주셨다.




우리가 다 크고 나서는, 마을의 밤나무는 동네 어르신들의 차지가 되었다. 밭일하다 말고, 그 날은 자루를 들고 산으로 들어가신다. 벌레 먹은 작은 밤들도 많다. 거칠고 굵어진 손마디에는 작은 밤벌레쯤이야 대수롭지도 않다. 추석이 되어 오랜만에 모인 도시에서 온 자식들을 대동해, 부모님은 그동안 봐놓은 밤나무숲으로 앞장서신다. 우리는 추억을 줍는다. 털북숭이 가시에 찔려도 '하하' 웃으며 빼버리면 그만이다. 내 손에도 어느덧 단단한 살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조카들은 처음 해보는 밤 줍기에 신이 나 있다. 작은 아이 혼자서 산속을 다니며 한 알, 두 알 줍던 건 기억 속에 자리한 편린이다. 시끌벅적하게 가족들이 와서 자루에 밤을 담고, 시원스레 밤나무가지도 꺾어서 자동차 뒷자리에 가을을 장식해 놓는다.




내가 사는 곳의 공원에도 밤나무가 있다.
허리를 굽혀 평지에서 밤을 줍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발짝을 떼기도 전에 여기저기 수두룩하게 널려있다. 푸짐하게 주머니 가득 담아 와 냄비에 삶아 놓는다. 그런데 맛이 어찌나 떫고 쓴 지,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그제야, "나도, 밤나무야! "라고 한다.

(나도밤나무의 마로니에열매)

그 이후론 그냥 몇 개 주워다 놓는다. 가을이라서. 그래도 열매가 어찌나 크고 예쁜지 한 알만 잡아도 손에 꽉 쥐어진다. 반들반들하고, 차가우면서도 손에 착 감기는 듯한 엷은 느낌에 마음이 촉촉해진다.


꼼지락꼼지락, 손 안에서 알밤을 굴린다. 어린 나도, 어른이 된 나도. 추억들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아련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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