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썰매

by Jane Anne


오랜만에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이상기온으로 겨울인데도 하릴없이 비만 내리더니, 드디어 눈님이 오셨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 커튼을 젖혔더니 세상이 변해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똑같은 모습에, 똑같은 일상이었는데. 드디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마음이 들썩들썩 인다.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보자기를 풀었다. 아이들 겨울 바지며 모자, 장갑을 풀어헤쳤다. 일 년 만에 입은 겨울 바지가 엉덩이에 끼여 불편하다며 뒤뚱뒤뚱한다. 어깨끈을 최대한 늘려, 바지를 아래로 끌어내려 준다. 나와 아이들은 모두 똑같은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얇은 티셔츠와 바지에 잠바를 두 개씩 덧대여 입고, 겨울 바지를 입었다. 목도리와 모자 그리고 장갑까지, 모두 다 갖추었다.




내가 사는 이 곳에는 눈썰매를 탈 수 있는 곳이 꽤 있다.

아이들 학교 앞의 아파트 단지에는 중간중간 동산을 만들어놓았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이면 그곳은 그냥 초록색 풀들로 덮여 있다. 그저 아이들은 동산을 뛰어올라갔다 도로 내려온다. 그리고 겨울이면 눈썰매를 탄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작은 동산의 계획된 용도인 것 같다.


대학교 교정에 주차해 놓고서, 그 옆에 있는 산으로 가면 아주 길고 가파른 언덕이 나온다. 내 꼬리뼈가 다칠 뻔한 곳이었지만, 아이들의 가볍고 유연한 몸동작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산으로 둘러싸인 공원길은 길을 걷다 탈 만한 곳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군데군데 언덕들이 참 많다.
눈이 오면 눈썰매를 들고, 그곳들을 찾아가 그냥 앉아있으면 된다.




올해에 새로 발견한 곳이 있다. 시장을 보고 돌아오다 사람들이 눈썰매를 갖고 오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 여름이었다면 드넓은 초원이었을 것이다.
평지를 조금 걸어가, 드디어 언덕을 찾았다. 간간이 크로스컨트리를 타는 사람도 보였고, 스키를 꺼내와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올해는 스키장이 문을 닫아서 이 곳에서 타고 있는 것 같다. 먼저 와 있던 두 아이의 엄마가 지쳤는지 돌아서서 걸어가고, 아이들도 제풀에 꺾여 엄마를 따라갔다.



우리만 있었다. 저 푸른, 아니 그 하얀 초원 위에.
아이들이 슬슬 타고 내려가다, 순식간에 저만치 멀어져 간다. 올라오는 게 다리가 아프다고 하여도, 자꾸만 눈썰매에 엉덩이를 갖다 댄다.

경사가 급하지 않아, 나도 타본다.
조금씩 움직이더니 속도가 붙는다. 바닥은 울퉁불퉁하지 않고, 앞서 간 사람들이 낸 길 옆은 푹신한 눈만 있다. 너무나 재미가 있다.


눈썰매에 몸을 단단히 붙여놓고, 줄을 잡고 슬슬 시동을 건다. 눈썰매가 천천히 움직이다 제 갈길을 찾아 빨라진다. 차가운 바람이 모자와 마스크를 비집고 들어와 양볼을 빨갛게 만들어 놓는다. 눈썹은 하얀 눈알갱이가 이슬처럼 붙어있다. 심장이 콩닥콩닥, 그만 멈출까 싶다가도 "에라, 모르겠다", 앞만 보고 미끄러진다. 등을 아예 뒤로 젖혀버린다. 화~ 환호성을 내지른다.

내 마음에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있다. 나는 눈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썰매가 재미있다. 아이들과 똑같이 입으니, 눈 위에서 같이 굴러다녀도 거리낌이 없다. 나는 엄마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의 어린아이가 나와서 내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넓고 넓은 초원 위, 눈썰매를 타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고, 저만치에서만 띄엄띄엄 사람들이 보인다.
어느덧 해가 산등성이 구름 사이로 붉은빛을 남겨놓다, 아예 사라져 버렸다. 희뿌연 하늘에는 아직 빛이 나지 않는 하얀 초승달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딱 두 번만 더 타고, 서둘러 내려가기로 했다. 요 때에만 사이좋은 남매가 되어 썰매를 끌어달라고 아우성친다. 올 때와는 다르게, 다시 어려진 나는 더욱 힘이 생긴 것 같다. 아이들 썰매를 끌고 초원을 내려온다. 뒤에서는 우리를 따라 어둠이 조금씩 따라온다. 아이들에게 겁을 줘 본다. 늑대가 나올 거라고, 귀신이 따라올 거라고 해도, 신나게 논 아이들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하늘의 초승달만 점점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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