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끼에토(inquieto), 불안하게 안정감 없이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사별하고, 한부모 가정의 외동딸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머니의 사망 이후, 나에게 가중되는 집안일은 그 전보다 많았고, 학교생활은 점점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사별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던 ‘엄격한 어머니’의 그늘이었다. 대학원 입학 후,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지니고 있던 나의 자기이야기는 “어머니의 생기를 갉아 먹으며 기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일기, 2013.05.06.
어머니는 ‘전신성 홍반성 루푸스’라는 만성 자가면역질환자였다. 하지만 임신 전에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임신 개월 수가 점점 늘어갈수록 건강이 안 좋아져 병원을 방문하고 나서야, 자가면역질환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루푸스는 임신 중 악화할 가능성이 있어 태아와 산모의 생명 모두 위험해질 수 있기에, 임신을 하면 안 되는 질병이라고 한다. ‘임신을 하면 안 되는 질병’이라는 말은 내가 어머니에게 자주 들었던 병환 설명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신의 병력을 설명할 때면 늘 “이 병이 원래 임신을 하면 안 되는데, 낳지 말라는 말들을 뿌리치고 얘를 낳았어.”라는 말을 서두에 붙이곤 했다.
루푸스와 임신의 상관관계에 대한 서울대학교병원 건강칼럼에 의하면, 실제로 과거에는 임신으로 인한 루푸스 악화를 염려하여 임신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임신했을 경우 유산을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이러한 권유가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으며, 임신으로 인한 병의 악화는 흔하지 않고, 악화되어도 정도가 심각하지 않아, 관절염이나, 홍반, 피로감 증가 등의 증상이 주로 나타남이 알려졌다. 물론 병의 악화가 흔하지 않을 뿐, 여전히 루푸스 질환을 앓고 있는 산모는 고위험군의 임산부이다. 실제로 루푸스 산모의 경우 50%만 정상아를 분만하며, 25%는 조기분만, 나머지 25%는 유산 혹은 사산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서울대학교병원 건강칼럼, 「루푸스를 앓고 있는데 임신은 어떻게 하여야 하나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08137&cid=63166&categoryId=51020, (2023.06.18)
하지만 어머니는 임신 8개월이 거의 다 되어서야 루푸스를 앓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만삭이 다 된 산모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딱 두 가지 뿐이었다. 아이를 포기하거나, 낳거나. 하지만 출산예정일까지 기다리기에는 산모의 건강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컸다. 결국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었다. 산모와 아이, 모두의 생명을 살리기에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날로 ‘진료실을 뛰쳐나가’ 예정일에 무사히 출산하게 되었다. 이 사건 역시 어릴 때부터 자주 듣던 것으로, 어머니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자신의 병력에 대해 말할 때, 늘 이 시기부터 설명하곤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병력부터 시작하여,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내가 너를 목숨을 걸고 낳았는데”와 같은 말들을 수없이 들어와, 마치 대사처럼 외웠을 정도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10년 넘게 이 말을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의 이 말은 내가 어머니께 가지는 ‘죄책감’의 근원으로 자리 잡았다. 한 사람의 반짝거리는 생을 완전히 흑백으로 만든 채, 그 삶에 있던 색채는 모두 내가 빼앗아 가 나만 빛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어머니를 사별한 지 10년이 훌쩍 지나, 내가 서른 살이 넘어서까지도 나를 지배하는 무거운 감정이었다.
출산 이후 ‘무사한’ 것은 나뿐이었다. 그날부터 어머니 인생에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91년도에 루푸스 판정을 받은 후로부터, 독한 약물로 인한 부작용 및 합병증이 발병하기 시작했다. 98년도에 설암 및 갑상선암이 발병하였으며, 2001년도에는 폐로 전이, 2007년도에는 간으로 전이되어 오랜 투병 생활과 입·퇴원을 반복하셨다. 그리고 결국 약 18년가량을 병마와 싸우다 2008년 06월 만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치셨다.
어머니의 투병일기에서 발췌
나의 유년 시절을 돌이켜보면 따뜻한 기억보다는 매서운 기억들이 상대적으로 가득하다. 또한 가정 내에 모든 초점은 환자인 어머니에게 집중돼 있었고, 그곳에 어린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나의 주 양육자는 외할머니가 되기도 하고, 친할머니가 되기도 했으며, 때론 아버지가 되기도 했고, 동네 교회 목사님이 되거나, 때에 따라서는 어머니가 되기도 했었다. 어머니의 병환에 따라 주 양육자가 수시로 바뀌었다.
나의 어머니는 굉장히 냉혹하고 엄격한 분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자주 분노했던 모습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머니가 화를 내는 이유는 모두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몸이 아프고 자주 피로가 쌓였기에 상당히 예민한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헤아리고 배려하기에 너무 어렸던 나는 그 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내 감정을 ‘없애기’에 힘쓰며 살았다. 그래야지만 의미 없이 다가오는 분노들에 마음을 잃지 않고, 상처를 덜 받고, 그나마 나를 지키며 무너지지 않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겉으로 표현할 때, 내 감정을 없이 했을 뿐, 내면에서는 계속해서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이를 레너드 쉔골드(Leonard Shengold)는 ‘영혼 살해(soul murder)’라고 부르며, 아이가 주위의 성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시기에, 고의적이고 장기간 반복되는 과다한 자극과 감정적 박탈을 교대로 겪게 되면, 무력감과 분노의 결합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에 주목하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이는 이런 감정들을 억압하고 느끼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 노출되게 되는 것이다.
Phyllis Tyson·Robert L. Tyson, 박영숙·장대식 역, 『정신분석적 발달이론의 통합』, 2013, 205면.
하지만 어머니의 사망 이후 나의 이런 분노는 갈 길을 잃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태우기만 했다. 왜 이렇게 어머니에게 억울한 마음이 들고 화가 들끓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스스로 이런 감정을 지니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꾹꾹 덮어놓기만 했다. 감춰놓기만 해 이름조차 알 수 없었던 그 감정이 ‘분노’인 것을 깨달은 것은 대학원 첫 학기 수업에서였다. 2019년 1학기 <현대문학과 문학치료> 수업에서 다루는 이론서를 읽던 도중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그때의 충격이 선명히 기억난다. 평범한 이론서를 다루던 수업이었는데, 난 혼자서 행간의 의미에 묶인 채로 계속 충격에 휩싸여있었다. 이후로도 문학치료 수업을 듣는 도중 나는 자주 행간에 꼼짝없이 온몸이 묶인 채 과거를 되새김질하길 반복했다. 비단 앞서 말한 수업뿐만이 아니라, 모든 수업이 내게는 이론수업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제롬 브루너(Jerome Bruner)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조직화하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패러다임적 방식”과 “내러티브 양식”을 사용한다고 한다. 특히 후자의 방식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의미화하는 것으로,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경험’이 ‘내러티브’로 전환하고자 하는 활발한 힘의 이끌림에 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내러티브로의 변환을 문예창작을 공부하던 대학교 학부시절부터 끊임없이 해왔다. 대학 졸업 이후 육아 대체직으로 직장을 다니던 13개월의 시간을 제외하면, 2013년부터 현재까지 약 10년 동안 계속해서 삶의 조각 중 일부를 내러티브화 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온 것이다. 그 작업은 시, 소설, 수필, 대본 등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으며, 2015년부터 2021년까지 꾸준히 써 온 일기를 통해 담기기도 했다.
Jerome Seymour Bruner, 강현석·김경수 역, 『이야기 만들기』, 교육과학사, 2010, 11면.
그 과정에서 변환점이 되었던 것은 단연코 2019년에 대학원에 입학한 사건이었다. 처음 대학원 입학을 결심했던 표면적인 이유는 간단했다. 학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고, 계속해서 글을 쓰며 살고 싶은 목표가 있었기에, 그러려면 ‘나를 알아야 한다’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보다 그 안은 꽤 많은 매듭들로 엉켜있었다. 가볍게만 생각했던 ‘나를 알아야 한다’라는 문장 안에는 수많은 굴곡진 나의 자기이야기가 들어가 있었다. 지금까지 알아봐 주길 바랐던, 하지만 차마 알아채주지 못했던 자기이야기들이 도처에 숨어 있었다. 입학 당시에 내가 인식하고 있던 자기이야기 키워드는 ‘청소년기 어머니 사별’, ‘엄격한 부모’, ‘자기감정 신체화’ 등 굉장히 표면적인 것이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이야기의 요소들이 부유하듯이 떠다녔을 뿐, 그것들이 발생시키는 감정의 지연이나 촉발 등이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 그래서 현재의 ‘나’는 어떤 상태인지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자연스레 지금의 ‘나’에게 그 요소들이 의미했던바 그리고 현재 의미하고 있는 바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 반복되는 침습적 반추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어서, 체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빨리 고갈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2019년 11월 28일, 생애 처음으로 상담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으로 학교 상담센터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당시 상담에서 학기 중의 감정을 회상하며 “마치 침대 위에 잔뜩 쓰레기와 물건들로 어지럽혀져 있는 상태에, 손님이 찾아온다고 해서, 그렇게 급하게 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은 상태의 연속”이었음을 처음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1차 개인상담 2회기 자기분석일지, 2020.01.21.
그렇게 나의 자기이야기 조각들은 내가 직면하기로 결심한 대학원 입학 이후부터 계속해서 눈앞을 부유하며 떠다녔고, 손에 닿는 것 같다가도 금세 하루살이 떼들처럼 눈앞을 휘저었으며, 또 다시 가라앉다 떠다니는 것을 한동안 반복했다. 심리적 시야가 가로막힌 불투명한 상태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손댈 수 없는 것을 건드린 것은 아닌지’, ‘과연 이 뿌연 시야가 사라지기는 할지’에 대해 한동안 좌절 섞인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토록 나의 시야를 뿌옇게 만들던 자기이야기 조각들이, 2020년 겨울에 한 번 그리고 2022년 여름에 또 한 번, 서서히 침잠하기 시작했다. 나를 이루는 것들이 무엇인지 모르게 잔뜩 모호하게만 보였던 것들이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가라앉았다 부유하다를 반복하던 자기이야기와 그로 인해 파생됐던 감정들이, 서서히 손에 잡히는 단단한 지면으로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다 다시 뿌연 안개 속으로 부유하는 느낌을 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체감상 그 진폭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간들은 내게 있어서 서서히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그러나 산발적으로는 시원한 장대비로도 함께 다가왔다.
석사 과정 2년 그리고 수료 이후 3년, 총 5년의 시간 동안 대학원에서 마주한 대부분의 시간은, 내게 침습적 반추를 의도적 반추로 전환할 수 있는 자발적인 훈련 시간이 되어왔다. 누에고치가 실을 자아내듯이 끊임없이 내 안에서 이야기들을 뿜어내며, 계속해서 자기이야기를 서사화하고 토해내기에 바빴던 시간들이었다. 스스로도 ‘또?’라는 생각이 들만큼 반복적인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고, 그러한 반복을 마주할 때마다 시원한 마음과 동시에 ‘아직도’라는 절망감 역시 함께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그러한 의도적 반추 과정들을 계속 반복하며, 현실로 끌어오는 작업들을 지속하자 어느 순간부터 조금은 다른 이야기, 다른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너무도 생생하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기억과 경험들이 점점 아무렇지도 않은 사건으로, 그리고 조금은 빛이 바랜 하나의 사진 속 기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는 비교적 최근의 경험으로, 2020년 11월 10일부터 시작한 집단상담에서 처음으로 고백한 심리적 변화이다.
내가 참여관찰자로 참여한 집단상담으로, ‘성장과정 중 부모사별 경험이 있는 만 19세~29세 청년’을 대상으로 한 집단문학치료 프로그램이다. (최남미·배진형·정미경·조은상, 「부모사별을 경험한 청년의 외상 후 성장 문학치료 프로그램 사례연구」, 『독서치료연구』 15(2), 한국독서치료학회, 2023.)
또한 이후에 경험한 12회기 개인상담을 통해서도 개인적으로 심리적인 안정감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때 주로 나를 힘들게 했던 감정은 ‘죄책감’이었는데, 오랫동안 박혀있어 그 존재도 몰랐던 가시가 처음으로 건드려지는 것만 같은 괴로움을 동반했다. 마치 이 모든 작업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은 절망감이 나를 사로잡아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꾸준히 상담을 받고 스스로를 알아채주는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기 문학치료 수업에서 다룬 미메시스Ⅲ 텍스트를 창작하는 과정이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었는데, 무엇보다 ‘마음에 들게’ 쓰고자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저 습관적으로 플롯을 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나는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지’ 등을 생각하며 질답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미메시스Ⅲ의 공통된 변화 지점들 또한 파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점차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천천히 앞으로의 내용에서 풀어나가며, 그 과정에서 문학치료 수업들과 집단상담, 개인상담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만들기 과정을 통해 경험했던 나의 자기이야기 인식 변화 과정을 분석하며, 그러한 경험이 어머니를 사별한 이후의 외상 후 성장과 어떠한 연관성을 지녔는지도 함께 다뤄보고자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나의 자기이야기가 발굴되고 변화하며, 미메시스Ⅲ에 담긴 자기서사의 요소들도 함께 언급하고자 한다. 큰 범주에서 본다면, 저자인 내가 고인이 된 어머니를 애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며, 그 과정에서 지연되었던 애도 작업을 직면하게 되고, 유년 시절의 어려움들까지 함께 다루는 방향으로 서술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