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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응의 축제 Oct 27. 2024

1. 어느 때보다 추웠던 그해 6월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날은 이제 막 공기가 더운 습기를 머금기 시작한 초여름 즈음이었다. 교복은 이제 막 춘추복과 하복을 겸용해서 입기 시작할 때였는데, 이상하게도 이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매번 서늘하고 스산한 느낌이 든다. 사별 이후 그날의 기억을 세세히 되짚어보며 타인과 함께 공유한 것은 집단상담을 할 때가 처음이었는데, 1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파노라마처럼 그때의 상황이 선명히 그려졌다. 아래는 집단상담 당시 작성했던 <다시 쓰는 그날 일기>의 전문이다.


2008년 6월 4일 수요일, 날씨: 추운 느낌(서늘함)

여느 때와 같이 아침에 학교 가기 전 엄마가 입원한 병실로 갔다. 아빠는 이미 병실에 있었고, 1인실이었나, 2인실이었나. 엄마 혼자 입원한 병실이었다. 상황이 안 좋아 그전에 입원했던 6인실과 다른 병실로 들어갔다. (그 전날엔 엄마가 119에 실려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심각한 줄 몰랐다. 아빠는 구급차부터 계속 엄마와 동행을 했고, 그 전날 난 혼자 잠을 청했다. 늦게까지 TV를 봤던 기억이 있다.)

병실 안은 적막했고, 고요했고, 어두운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빠는 뒤돌아 있었던 기억만 있고, 엄마가 나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기운이 너무 없었던 엄마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고, 한 2~3번 더 계속 엄마에게 다시 말해달라고 청한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 “종이랑 펜 줄까?”를 얘기했는데,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두려웠다. 그 펜을 던져버릴까 봐. 엄마의 의중을 내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걸까봐. 

결국 난 엄마의 손에 펜을 쥐여주지 않았고, 그렇게 다시 학교로 향했다. 이때 정확하진 않지만, 당시 “교회 잘 다녀”라는 말 비슷하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재차 물었을 때 반복해서 비슷한 말을 한 거 보면, 그 의미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정확하지 않다. 그때 날 배웅하면서 아빠가 핸드폰을 잘 가지고 있으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병실을 나오며 엄마에게 학교 다녀오겠다고 인사할 때, “오늘은 학교 가지 말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들어갔다. 그 또한 혼날 것 같았기 때문에. 

아빠의 연락은 수업을 한참 듣던 도중 왔다. 당시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난 상체를 숙이고 조용히 전화를 받았고, 정확히 무슨 말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울먹이는 아빠의 목소리와 병원에 와야 한다는 그 말만이 기억난다. 수업 도중 난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께로 가서 말을 하고 짐을 그대로 둔 채 밖으로 나왔다. 담임 선생님을 찾았지만, 교무실에 없었고, 당시 수업 중이신 교실을 물어 찾아갔다.

 교실 앞문을 노크하고 기다리며, 그 찰나에 ‘왜 난 이렇게 침착하지’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스스로의 감정이 이상하다고 느꼈고, 담임 선생님께 이야기하면서 ‘이때쯤엔 울먹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말하면서 울먹이기도 했다. 말씀을 드리고 난 직후 학교를 나서는 그때의 묘한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적막한 복도와 밝은 햇빛이 비치는 학교 계단을 홀로 내려가는 느낌이 뭔가 기묘했다.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 동안 울거나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병실에 도착하자 엄마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아빠는 엄마 좀 주물러 주라고 했고, 여태까지 엄마에게 늘 주물렀던 대로 계속 주물렀다. 그러면서 심장이 뛰고 있는지 계속 손을 대면서 확인했다. 아빠는 그런 나에게 심장을 누르지 말라고 말했지만 난 누른 게 아니라 뛰는지를 확인한 것이었다. 박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주무르다가 젊은 의사가 와서 박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기계로 체크하고 사망 선고를 내렸다. 이때 주무르면서의 내가 이후 3일 동안의 나를 포함해서 제일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장례식 때의 난 거의 울음이 없었다. 스스로 이런 상황인 것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선 이런 때 많이 운다고 하는데, 울지 않았다. 아니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때의 난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내 기억 속 내가 제일 목 놓아서 통곡한 것은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한 3달인가... 한참이나 지나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전까지는 집에 가서도 계속 문을 열면서 학교 다녀왔단 인사를 하곤 했다. 왠지 그렇게 하면 나올 것 같았다. 어디선가. 여태까지 잦은 병원 입원으로 집에 없던 적이 많았기에. 

그런데 그날은 학교 끝내고 집에 와서 정말 그 ‘혼자’라는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왔던 것 같다. 거실에서 목놓아 울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론 학교 다녀왔단 인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아직도 그날의 엄마가 나에게 재차 하려 했던 말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 손에 펜을 쥐여줄걸...하는 생각이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집단상담 4회기 워크시트 <다시 쓰는 그 날 일기> 전문, 2020.12.08.)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늘 아쉬움, 속상함, 후회와 같은 감정들이 쏟아지곤 했다. 가장 먼저는 입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했던 어머니의 손에 ‘펜을 쥐여 줄걸’하는 후회였고, 두 번째로는 ‘학교 가지 말고 계속 엄마랑 있을걸’하는 후회가 뒤따라왔다. 늘 그래왔듯이 병원에 들렀다가 학교에 가는 루틴일 뿐인데, 그날은 유달리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이대로 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흔히들 직감 혹은 육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 나 학교 가지 말고 엄마 옆에 있을까?”라는 물음이 혀끝까지 맴돌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을 용기가 없어 꿀꺽 삼켰다. 


그럼 오늘은 학교에 가지 말까’라고 말하지 못했었다는 것에 대한 그런 후회랑도 이어지는 것 같아요. 약간 되게 그날은 감정이 묘하긴 했었거든요. 기분이 이상하다는 느낌. 학교를 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근데 학교에 안 가면 혼날 것 같아서 그 또한 말을 하지 못했었고.
(집단상담 4회기 축어록, 2020.12.08.)


나에게는 혼날 것을 알면서도 말할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 정도 학교 안 가는 것이 무슨 큰일인가 싶지만, 그때의 난 ‘어머니가 원하는 모범생 딸’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감히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무난하게 해오고 반복되었던 패턴과 달리, 평범하지 않고 일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여기서의 ‘평범’과 ‘일상’의 기준은 모두 어머니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그날 어머니의 기분에 따라 조금씩 좌지우지되기도 했다. 어머니가 바라지 않는 행동이라면 그것이 어떤 모양새를 띄고 있든지 간에 거부당했고, 파괴되었다. 나는 그렇게 내 자신이 파괴될 것이 무서워 입을 다물고 침묵하기를 선택했다.


나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그냥.. 그때 그... 어떻게 보면 유언인 거잖아요. 
상담자B   그렇죠
나  그 유언은 못 들어도 그만이지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게 계속 제 안에서 ‘그때 펜을 좀 줄 걸’이라는 생각이 남아있는 걸 보면, 그때가 너무 후회 되는 것 같아요. 그냥 한번 혼나고 말지 뭐가 무섭다고 펜을 안 줬을까...라는 생각.
상담자B 마지막까지도 엄마한테 하는 행동이 혹여나 엄마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봐
나   네, 그런 생각이 되게 많이 들었어요. 펜을 줄까를 한... 두 번인가를 물어봤었는데 그때도 계속 별다른 말이 없이 그냥 뭐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니라는 손사레를 치거나 이런 거 없이 계속 같은 그런 비슷한 발음만 했었거든요. 근데 그 비슷한 발음이 뭔지를 정확하게 모르겠었으니까.
상담자B 그걸 몰랐다는 것들이, 그리고 계속 모른 채 엄마를 보내드린 것들이 어떻게 남아 있으신가요
나   음... 아쉬움
상담자B 아쉬움?
나  네
(집단상담 4회기 축어록, 2020.12.08.)


이와 유사하게 마지막 유언이었을 지도 모를 어머니의 그 ‘다섯 음절’을 끝끝내 알 수 없었던 이유 역시 ‘엄마가 무서워서’였다. 손에 펜을 들려주면 그걸 병실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버럭 화를 낼 것만 같았다. 당신이 원했던 의도가 아니라며 소리치고 혼낼 것만 같은 두려움이 나를 잠식했다. 정확한 발음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힘없이 말하는 어머니를 향해, 2~3번 재차 물어보면서도 속마음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는 걸 싫어하는 그녀였기에 언제 어디서 화가 터질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같은 음절과 입모양을 달싹이며 반복하는 어머니를 향해 “종이랑 펜 줄까?”라는 물음을 건넸음에도, 결국 그 손에 펜을 쥐여주지는 못했다. 만약 그 손에 펜을 들렸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한 조각이지만, 만약 들렸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방향으로 후회와 아쉬움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난 그날이 어머니와 함께 한 공간에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는 것도 몰랐으며, 계속해서 같은 패턴으로 달싹이는 저 입모양이 유언과도 같은 행위였음을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한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인간이 다 예측하고 헤아릴 수 있을까.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의 마지막을 앞둔 사람 대다수가 그러지 않을까 싶다. 지금이 마지막 순간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는 있어도, 그렇지 않을 거라고 애써 부정하고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 어머니는 너무나 무서운 존재였기에. 늘 어디서 어떻게 화가 터질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만 말해도, 어머니 주변의 상황과 지형지물을 파악해서, 어떤 맥락에서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일지 스스로 파악해서 대답을 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와야 했다. 두 번 물어본다면, 으레 날카로운 소리가 쏟아지거나, 손찌검이 내게 떨어지고는 했다. (중략) 나는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어머니의 화가 타이밍이 안 좋아 내게 쏟아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2020년 2학기 <심리측정 및 평가> ‘자기 보고서’, 2020.11.26.)     


어쩌면 나의 후회는 스스로 두려움의 틀 안에 갇혀, 마지막 기회를 잡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도 이어져 있을 것이다. 펜과 종이를 그 손에 쥐여주기엔 내 두려움이 너무도 컸다. 어머니가 화를 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잔뜩 긴장하여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난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병실을 나왔다. 이날을 떠올릴 때면 늘 ‘혼나도 그냥 할걸’이란 후회가 뒤따른 이유이기도 하다. 그 후회는 미련한 집착으로까지 이어져서, 사별 이후 몇 년 동안이나 이 ‘다섯 음절’을 알고 싶어 했다. 나름 들었던 발음과 비슷하게 소리도 내보고, 입 모양도 따라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더 속상한 마음만 들 뿐 시원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유언이라도 뭔가 지면으로 써 놓으면, 나중에 심청이 커서 보고서 ‘이랬었구나. 이런 마음으로 날 낳았고 이런 마음으로 떠났구나’를 조금 이해해 보는 시간이 생길 텐데... 그런 게 없이 말로만 이루어지니까 그게 안타까운 게 좀 큰 것 같아요.
(집단상담 2회기 축어록, 2020.11.17.)     


이런 나의 아쉬움과 후회로 점철된 마음은 사별한 지 10년이 넘어서까지도 계속 따라다녔으며, 집단상담에서 처음으로 언어화하여 그 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심청전> 속 곽씨 부인이 떠나는 장면을 다루는 회기에서, 나는 유언을 남기는 곽씨 부인을 향해 아쉬움의 감정을 드러냈다. “안타깝다”는 표현을 써서 나의 감정을 조금은 감추고 한 발 떨어져 발화했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나의 미메시스Ⅰ이 자아낸 아쉬움의 감정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의식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일어난 감정의 촉발이었다. 


나에게도 역시 어머니의 유서나 유언이 남겨진 것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심청의 상황에 이입되었다. “이랬었구나, 이런 마음으로 날 낳았고, 이런 마음으로 떠났구나”라는 심청의 발화는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바라던 소망을 심청의 입을 빌려 하고 있었다. 특히 “이런 마음으로 날 낳았고”라는 표현을 발화하고 동시에 그것을 그대로 내 귀를 통해 들으며, 그동안 내가 간절히 듣고 싶던 말이 어쩌면 여기에서부터 출발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출산한 일을 어머니가 후회하거나, 돌이키고 싶은 과거로 여기지 않기를 소망했다. 이러한 나의 내적 소망이 계속해서 잔여물처럼 남아 있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바람이었기에 더더욱 심청의 목소리에 나의 자기이야기가 많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사별한 그 날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또 다른 단어는 바로 ‘이상함’이었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나서 병원으로 이동하는 나의 모습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느낄 만큼 감정적 동요가 없던 기억이 생생했다. 난 내 스스로가 ‘어딘가 고장이 난 것’처럼 느껴졌다. 감정의 동요 없이, 수업 중인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담임 선생님을 찾아 교무실과 당시 수업 중이시던 1학년 교실을 방문해 상황을 설명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해야할 일들을 차분하게 해나가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슬픔을 표출하지 않는 자신이 고장난 로봇처럼 느껴지고, 그런 내 모습에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러운 것과는 별개로 슬픔이나 비통함을 동반한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상복을 입고, 머리에 하얀 리본이 달린 핀을 꼽고, 조문객을 맞이하는 등의 해야 할 다음 동작들만 이어서 할 뿐이었다.    

  

반장과 선생님들(당시 담임 선생님, 국어 선생님,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조문객으로 찾아왔을 때, 어떠한 반응과 표정과 목소리를 해야 하는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3일 동안 머리를 못 감아서 떡이 졌으니 이해해주세요”라는 식의 말을 건네면서 웃었던 기억이 있다. 스스로도 굉장히 부조화스럽다고 느끼면서 말했던 거로 기억한다. 장례식장에서 웃는 유가족이라니. 하지만 그때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면서 말하는 것뿐이었다. 아직도 생생한 것이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국어 선생님의 표정이었다. 당시 그분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2020년 2학기 <심리측정 및 평가> 자기 보고서, 2020.11.26.)  

   

장례식 때도 그런 멍한 상태는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해리는 압도적인 수준의 외상적 고통이나 상실로부터 개인의 내면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해리 상태(dissociative state)에서는 정신적 주소가 현실과 분리되어, 실재감이 없어지게 된다. 이때 감정과 육체적 고통이 감소하며, 꿈과 같이 몽롱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고요한 감정이 유발되는 이유는 뇌에서 감정적 고통에 대처하기 위한 물질을 분비하여,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응 시스템은 문제 상황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며, 현실과의 단절, 무감각, 비현실성 등을 경험하게 한다. 


나는 계속해서 조문객들 앞에 서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감각이 붕 뜨면서, 멍한 정신이 이어졌다. 한 가지 아직도 생생한 것은, 그날 장례식에 왔던 국어 담당 선생님의 표정이었다. 복잡 미묘한 그녀의 표정은 오랜 시간 동안 내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나는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이할 때 한 번, 입관할 때 한 번. 총 두 번의 눈물을 흘렸다. 의사가 사망선고를 내린 이후, 무언가에 쫓기듯이 집으로 가 영정 사진으로 할만한 것을 골라 들고 빈소로 향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빈소에 가만히 앉아 영정 사진을 바라보는데 계속 정신이 붕 뜨는 것만 같았다. 하얀 국화꽃 사이에 놓인 어머니의 영정 사진은 방금 전까지 내가 그녀를 주무르면서 느꼈던 손의 감촉을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얼굴은 그저 평상시처럼 잠든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니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스스로를 ‘이상하고’, ‘일반적이지 않고’, ‘나쁜 것’, ‘불효막심한 사람’으로 여기며, 일종의 죄책감을 가졌다. 나는 왜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것인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슬프지 않은 것인가. 돌이켜보면, 스스로 이 딜레마에 빠져, 더더욱 죄책감의 수렁에 빠졌던 것 같다. 


이러한 죄책감은 어머니를 사별한 지 10년이 넘어서까지도 나를 따라다녔다.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 자기 탐색이 더 깊이 이루어지며 죄책감의 층위가 꽤 다양하고 나의 인생 전체에 포진해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계속해서 무명(無名)의 감정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것은 나를 시시때때로 과거의 상황으로 불러들였으며,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처럼 자꾸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뇌리에서 반복하게 만들었다. 침습적 반추는 외상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패턴으로,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요소이기도 하다. 1차 개인상담 첫날에, 칩습적 반추가 반복되었던 지난 학기를 돌아보며 “마치 마취가 안 된 상태로 수술대 위에 올라가 활짝 개복 된 장기들을 마구 헤집어지는 것 같은 느낌”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괴롭게 했다. 

1차 개인상담 1회기 자기분석일지, 202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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