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낭만의 독일 로만틱 가도로 떠나는 가족여행 #1
로만틱 가도(街道)의 뜻이 원래 '낭만적인 길'이 아니라 '로마로 가는 길'에서 유래했다는 것쯤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로마로 가는' 길은 역사적이고 멋진 도시들을 잇고 있는 데다 주변 풍경도 아름답기로 유명해 ‘낭만 도로'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독일 중부의 뷔르츠부르크(Würzburg)부터 남쪽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의 퓌센(Füssen)에 이르기까지 총길이 약 460 킬로미터에 걸친 로만틱 가도가 지나가는 도시와 마을의 개수는 29개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독일의 서부 지역 즉, 서독은 미국, 영국, 프랑스군이 각각 나누어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서독 정부는 나치 독일의 아픈 역사와 결별하고 중세부터 이어진 아름다운 독일의 이미지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서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고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독일 정부가 1950년에 만든 가상의 길이 바로 로만틱 가도이다.
참고로, 독일에는 알프스 관광지를 연결하는 알펜 가도, 옛 성들을 잇는 고성 가도, 괴테와 관련 있는 괴테 가도 등 다양한 이름의 관광 도로들이 있다.
이 계획이 뜻밖의 성공을 거두면서 로만틱 가도는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아시아의 일본인들이 너무 좋아하는 관광지로 꼽히고 있어 가도를 달리다 보면 일본어로 된 표지판도 볼 수 있다.(2010년대 중반 후부터는 중국 관광객이 가장 많은 것 같다.)
대도시보다는 중소도시의 아름다움이 더 돋보이는 독일에서 그 풍경이 빼어난 역사와 낭만의 로만틱 가도를 달리는 여행은 적잖은 시간이 걸리는 일인지라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이라는 모토로 사는 나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 독일 쾰른(Köln)으로 업무상 출장을 가게 된 나는 출장을 마치자마자 휴가를 내서 가족들과 4박 5일간 로만틱 가도를 달려보는 과감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 여행을 위해서는 가족들이 나보다 며칠 늦게 네덜란드에서 독일 쾰른까지 기차를 타고 와 주어야 했고, 가족들과 조우하는 주말에 쾰른에서 차를 빌려 가도의 출발점인 뷔르츠부르크로 이동하는 것이 원대한 계획의 시작이었다. 유럽 내에서 혼자 아이들만 데리고 장거리 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아내가 적잖이 부담스러워했으나 당일 새벽부터 지속적으로 문자와 통화를 한 끝에 반갑게 쾰른 중앙역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해가 지지 않는 쾰른의 여름 저녁, 시원한 쾰쉬(Kölsch) 맥주 한 잔을 놓고 아내와 일정과 동선을 다시 정리해 봤다.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로만틱 가도에서 가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우리는 여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스타일이어서 되도록 욕심을 버리는 선택이 필요했다.
렌터카는 여행 마지막 날에 뮌헨(München) 공항에서 반납하도록 예약해 두었고, 당장 다음날은 쾰른에서 뷔르츠부르크까지 이동만 하더라도 반나절이 소요될 것이므로 실질적으로 로만틱 가도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3일 낮과 밤으로 계산되었다.
쾰른에서 이미 나흘 가량을 출장으로 보낸 나는 출발도 하기 전에 온 몸에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 같았으나 아이들은 간만의 여행에 신나서 재잘거렸다. 아침에 렌터카부터 문제가 없기를 바라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태양의 나라 로마와 추위로 얼어붙은 북유럽을 연결하였고 중세 시대에는 교역로로 번영했던 로만틱 가도의 출발점이자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인 뷔르츠부르크는 쾰른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330km 떨어져 있다.
아침에 꿀잠을 달게 자는 아이들을 깨워 일으켜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은 후에 쾰른 중앙역의 렌터카 사무실로 향했다. 전날 햇빛 아래 쾰른 시내를 걸었던 아이들이 출발도 하기 전에 피곤하다며 투덜댔지만 일단 차에 타기만 하면 편하게 쉴 수 있다고 타일렀다.
유럽 여행의 백미는 렌터카 여행이다. 조금만 달려도 국경을 지나며 바뀌는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즐겁지만 여행을 할 때마다 다양한 메이커의 차를 몰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독일에서는 독일차'를 타자며 메르세데스-벤츠의 중형 세단을 예약해 둔 나는 잔뜩 기대하고 렌터카 업체 카운터에 섰다.
'MB C 클래스로 예약했습니다.'
'흠.. 글쎄요. 지금 재고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전화를 돌리던 직원은 지금 있는 차가 오펠의 인시그니아 왜건뿐이라며 다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오펠도 독일차이고 왜건인 데다 디젤이라 자기 생각에는 더 좋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 출발부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성수기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왜건은 내부가 생각보다 넓었고 새 차인 데다 디젤 엔진이라 연료비를 아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 오전의 번잡한 쾰른 시내를 빠르게 빠져나온 진회색 왜건은 이내 고속도로 위로 올라섰다.
내일부터 운전할 로만틱 가도는 국도여서 천천히 달려야 하지만 오늘은 속도 무제한의 '아우토반'을 달린다는 생각에 뻥 뚫린 고속도로를 보자마자 기분이 들떴다. 하지만 아우토반에는 중간중간 공사 구간이 많아 속도를 많이 낼 수도 없었거니와, 속도 무제한 구간에서는 '안전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아내의 강력한 태클 덕분에 액셀레이터를 맘껏 밟아볼 수가 없어 빛 좋은 개살구였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내가 조금이라도 가속하려고 하면 속도를 줄이라고 주의를 주었고, 즐거운 여행이 험악하게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나는 포르셰나 비머 또는 아우디의 슈퍼카들이 한순간에 내 앞에서 점이 되어 사라지는 장면을 구경해야 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아이들을 위해 프랑크푸르트(Frankfurt)를 지날 무렵 휴게소로 들어갔다. 독일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은 유료(50센트)이나 휴게소 식당을 이용하면 화장실 쿠폰을 준다. 인스턴트 햄버거로 배를 채운 가족들이 차례대로 화장실을 다녀온 후에야 다시 시동을 걸었다.
뷔르츠부르크에 들어서니 시간이 어느새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도시의 첫인상은 포근하고 아기자기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뷔르츠부르크 대학(1402년 개교)이 있는 대학 도시이자 역사의 도시 뷔르츠부르크는 서기 7세기경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가문의 지배를 받았고, 아일랜드 출신의 선교사 성 길리안(St. Kilian)이 기독교를 전파한 곳으로 뷔르츠부르크의 대성당은 성 길리안에게 봉헌되어 있다.
뷔르츠부르크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의 폭격으로 도시의 90%가량이 철저하게 파괴된 아픈 기억이 있는 도시이다. 지리적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나치 독일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 중 하나였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20분도 안 되는 폭격으로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대부분의 역사적 건물과 유적이 파괴되었던 탓에 현재는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기보다는 전쟁 후 시민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복원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뷔르츠부르크 레지던츠(왕자-주교의 궁전)에는 2차 대전 당시 폭격 직후의 도시 모습을 찍은 항공사진을 전시하고 있어 전쟁의 참상을 일깨우고 있다.
아담한 도시는 걸어서 구석구석을 다녀볼 수 있으므로 일단 호텔에 체크인을 하기로 했다. 호텔에 딸린 낡은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 난감해했더니 리셉션에서 친절하게 옆 건물 지하 주차장의 주차권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골목길과 지하 주차장의 통로가 어찌나 좁았던지 일단 거기 차를 넣는 것이 엄청난 공간 지각력 테스트였다.
예전에 스페인 세비야를 방문했을 때 겪었던 주차장의 악몽이 떠오를 무렵, 기다란 왜건을 겨우 지하 주차장에 구겨 넣고 한숨을 돌렸다.
호텔은 에어 비앤비 수준의 작은 시골 여관이긴 해도 나름 깔끔하게 청소를 해 두어 큰 불만은 없었다. 대충 방에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제일 먼저 뷔르츠부르크 레지던츠를 1차 목적지로 삼고 길을 나섰다.
뷔르츠부르크는 마인강(Main River)을 끼고 동쪽에 발달해 있다. 우리 숙소는 서쪽 강가에 있었으므로 숙소를 출발해서 동쪽 끝에 있는 레지던츠까지 걸어가다 보면 뷔르츠부르크의 주요 랜드마크를 지나가게 된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시장 광장 옆에 우뚝 서 있는 고딕 양식의 교회였다.
마리아 예배당(Marienkapelle ; Maria Chaple)이라 불리는 이 교회는 1377년에 착공되어 1차 완공까지 백여 년이 소요된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정식 사목 성당(Parish Church)이 아니라 예배당이다. 건물의 측벽에 보강된 버트리스와 뾰족하고 기다란 창문, 높은 첨탑과 더불어 좀 더 넓은 형태의 바실리카 모양이 후기 고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예배당의 남쪽과 서쪽, 북쪽에 난 건물 입구 위에 올려진 고딕의 반원형 장식 구조물은 전체적으로 건물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이 예배당 역시 2차 대전 폭격 당시 상당히 파괴되어 1960년대에 복원되었는데, 15세기에 완성된 이 장식 구조물은 피해를 입지 않아 원형 그대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17세기에 그려진 예배당의 그림을 보면 첨탑을 제외한 건물의 외관이 전체적으로 회색 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 예배당을 지나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골목 사이로 내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둥글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전면부가 돋보이는 뉴 뮌스터 성당(Neumünster)이다. 건물의 전체적인 외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바실리카 모습이지만 서쪽으로 향한 전면부만 붉은색 바탕에 흰색 동상들로 장식되어 독특하다.
성당의 내부는 1700년대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거장 짐머만 형제(Johann & Dominikus Zimmermann) 형제에 의해 장식되었다는데 내부 관람은 하지 못했다. 성당의 주 제단도 바로크 양식이라면 체코 프라하의 성 니콜라스 성당처럼 화려함이 극에 달할 것이다. (프라하의 숨겨진 화려함, 성 니콜라스 성당)
뉴 뮌스터 성당의 바로 옆에는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높은 쌍둥이 첨탑이 솟아 있다. 이 곳이 바로 뷔르츠부르크 대성당(Würzburger Cathedral)의 서쪽 입구이다.
독일에서 네 번째로 큰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대성당은 앞서 이야기했듯 성 길리안에게 봉헌된 뷔르츠부르크 대주교좌로 서기 1040년에 착공되어 여러 번의 리빌딩을 거친 후 1255년에 완성되었다. 이 대성당 역시 2차 대전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1967년에 복원이 되었다.
위에서 보면 거대한 십자가 모양이 뚜렷한 이 대성당은 건물 동쪽에도 두 개의 첨탑이 솟아 있어 총 4개의 탑이 뷔르츠부르크의 랜드마크처럼 강 건너 마리엔베르크 요새에서도 선명히 내려다 보인다.
뷔르츠부르크 레지던츠를 몰랐을 때는 '이 작은 도시에 웬 궁전인가?' 싶었다. 이 웅장한 주교 궁전은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이나 비엔나의 쉔부른 궁전에 필적하는 18세기 바로크 양식 건축의 걸작으로 198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건물은 1720년에 착공하여 1744년에 외형이 완성되었고, 인테리어는 당대 바로코/로코코 건축 예술의 거장 요한 B. 뉴만(Johann Balthasar Neumann)이 유럽의 건축가와 미술가들을 모아 1781년에 마무리한 웅장하고 호화롭기 그지없는 '성직 제후'의 대저택이다.
참고로, 중세 신성 로마 제국에서 '성직 제후'는 황제로부터 땅을 받아 직접 통치 행위를 한 대주교로 일반 영주와 같은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가졌었다. 뷔르츠부르크에서 가봐야 할 곳을 딱 한 군데 꼽으라면 단연 이 곳 레지던츠이다.
대성당을 지나 약 5분가량 골목을 따라 걸었더니 큰길 건너편에 길고 거대한 궁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넓디넓은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까이 가보니 뜰 한가운데에 청동 분수대가 서 있다. 뷔르츠부르크 깃발을 손에 들고 왕관을 쓴 여인은 이 지역인 프랑코니아(Frankonia)의 영광을 상징한다.
좌우 폭이 170미터에 이르는 궁전은 어떤 각도로 봐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 규모가 실감이 난다.
뷔츠부르크 레지던츠는 5개의 홀과 300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방들은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방에서 방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눈으로만 그 아름다움을 담았다.
궁전 내부의 방들은 바로크 양식에 따라 임페리얼 룸, 화이트 룸, 그린 페인트 룸, 정원 룸 등 온갖 화려한 방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어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뉴먼에게 궁전 건축을 명한 당시 뷔르츠부르크의 성직 제후 요한 필립 프란츠(Johann Philipp Franz von Schönborn)는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베르사유에 버금가는 자신의 궁전을 짓고 싶었으나 궁전 건축이 시작된 지 4년가량 된 어느 날 심장마비로 비명횡사했다. 궁전은 그의 동생에 의해 1744년에 외형 건설이 완성되었다.
레지던츠에도 하이라이트가 있는데 바로 계단의 방이라 불리는 곳이다. 마치 귀족이라도 된 듯 붉은 카펫이 깔린 넓은 계단을 올라가면 천장에 폭 19m X 넓이 32m 크기의 세계 최대의 프레스코화를 만날 수 있다. 천장은 각 모서리가 둥그렇게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실제 그림의 넓이는 더 넓다.
이 천장화는 18세기 당대 최고의 프레스코 화가인 베네치아의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가 1752년부터 1753년까지 그린 그림이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을 상징하는 내용으로 그려져 있으며 왕자-주교인 요한 필립 프란츠의 초상화가 유럽을 상징하는 그림 윗부분에 그려져 있다.
세계 최대의 프레스코화라고 하지만 높은 천장에 있는 그림이라 자세히 감상하는데 한계가 있어 좀 아쉬웠다.
한편, 궁전의 건축 당시 그림이 그려질 계단 방에는 둥근 천장을 받치는 기둥이 없어 안전성에 많은 논란을 낳았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폭격에 이 천장은 피해를 입지 않아 프레스코화가 보존될 수 있었다. 레지던츠도 천장이 파괴된 부분이 많았는데 천만다행이다.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찍어도 보안 요원이 제지하지 않아 나도 재빨리 한 컷 담아 보았다.
레지던츠 내부를 관람하다 보니 두어 시간가량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밖으로 나오니 건물의 남쪽과 동쪽에 궁전 부지만큼 커다란 정원이 펼쳐져 있다. 두 정원 모두 가운데 분수대를 두고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가꿔 두었는데 정원에서 바라보는 궁전도 매우 아름답다.
레지던츠를 둘러보고 나니 가족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날씨가 선선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무더웠다면 구시가 산책은 엄두도 못 낼 정도. 저녁에 좀 더 시내를 걷기 위해 에너지 보충이 필요한 시간, 레지던츠 정원에 앉아 쉬던 중에 검색을 돌려본 나는 구시가 한편에 있는 오래된 독일 식당을 하나 찾아냈다. 출장부터 근 일주일 가까이 독일에 있었던 나는 사실 독일 음식이 질릴 대로 질린 상황이었지만 점찍었던 이태리 식당이 이날 공교롭게도 문을 닫는 바람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뷔르츠부르크에서 독일 식당에 가봐야 할 이유는 이 곳의 특산 ‘프랑켄(Franken)’ 와인 때문이다. 강하지 않으나 드라이하면서도 산도가 높은 이 로컬 화이트 와인은 '독일 와인은 맛이 없다'는 내 편견을 한방에 날려주었다. 별다를 것 없는 투박한 잔에 콸콸 따라준 와인 맛에 반해 연거푸 잔을 들이켰다.
음식 역시 생각보다 입맛에 맞았다. 배가 안 꺼졌다며 저녁을 안 먹으려던 아내도 와인을 계속 홀짝이다가 아들이 주문한 음식을 맛보더니 소스가 너무 맛있다며 하나를 더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버섯과 감자가 곁들여진 치킨 요리는 치즈 풍미가 가득한 소스가 뿌려져 매력적이었고, 으깬 감자도 부드럽고 고소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구시가 한가운데로 걸었다.
레지던츠부터 걸어온 길을 따라 강 쪽으로 걷다 보면 마리엔 성당이나 뷔르츠부르크 대성당 주변을 통과하는 구시가지 길을 만나게 되는데, 그 길 끝 마인 강가에 다다르면 유명한 도보 다리인 알테 마인교(Alte Mainbrücke)가 눈 앞에 나타난다.
다리로 가는 길에 등 뒤에서 트램이 달려오고 있어 돌아보니, 뷔르츠부르크 대성당의 종탑이 당당히 서서 분위기를 살리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 도시의 모습에 절로 여유가 생긴다.
체코 프라하에 유명한 카를교가 있다면 뷔르츠부르크에는 '작은 카를교’라 불리는 '알테 마인교(Alte Mainbrücke)'가 있다. 아치형의 도보 전용 돌다리로 양쪽에 성인들의 조각상들이 서 있는 모습까지 이 다리는 여러 모로 카를교와 닮았다. (예술과 낭만의 완벽한 조화, 프라하의 상징 카를교)
15 ~ 16세기에 건설된 후 19세기 이후 증개축된 알테 마인교는 도시와 건너편 마리엔베르크 요새를 연결하는 뷔르츠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자 19세기 말까지 유일한 다리였다. '알테 마인교'란 말 그대로 '오래된 마인강의 다리'라는 뜻이다. 길이 185미터, 넓이 약 8미터에 이르는 다리는 7개의 아치가 받치고 있는데, 1990년 이후로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도보용으로만 사용되고 있단다.
알테 마인교로 올라서는 입구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어 우리가 다리 앞에 도착한 것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재미있게도 다리 입구의 선술집에서 와인을 잔으로 팔고 있었고, 사람들이 다리 양쪽에 서서 와인을 마시고 수다를 떨며 여름의 늦은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시장통이 따로 없었지만 낭만적인 유러피언의 여름 일상이다.
이른 저녁을 먹으며 와인을 한 잔 했던 아내가 우리도 다리 위에서 프랑켄 와인을 한 잔 더 하며 기분을 내보자고 했다. 선술집은 마치 햄버거 가게의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처럼 주문대가 다리 쪽으로 뚫려 있었다. 로제 와인 2잔을 주문했는데 가격이 좀 비싼 것 같아 물었더니, 와인 글라스 하나당 5유로의 보증금도 받는다. 하긴, 저 많은 사람들이 유리잔을 들고 다리를 걷고 있는데 보증금이 없다면 잔들을 수거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는 아까 마셨던 화이트 와인보다 맛이 좀 떨어졌다. 인상적이었던 화이트 프랑켄 와인과 맛이 다르다며 아내에게 살짝 핀잔을 듣기는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이렇게 아름다운 고성 도시를 배경으로 상쾌한 강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핑크빛 로제는 그 자체로 호강인 것을.
알테 마인교의 양쪽에는 기독교 조각상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조각상들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와 그의 아버지 피핀(Pippin the Younger), 그리고 10명의 성인들로서 이 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했던 성 길리안이나 성모 마리아 등이 포함되어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12개의 조각상은 프라하의 카를교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카를교의 조각상은 300여 년에 걸쳐 차근차근 세워졌다면 알테 마인교의 석상들은 1729-30년에 모두 세워졌다.
다리 양쪽의 조각상들을 감상하다 보면 의외의 성인이 눈에 띄는데 바로 성 요한 네포무크(St. Johannes von Nepomuk)의 동상이다. 네포무크는 프라하의 수호성인으로 프라하 카를교에 있는 그의 동상을 만지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였던 프라하에서 본 네포무크의 동상을 뷔르츠부르크에서 만나니 신기했다.
알테 마인교에는 또 하나 재미있는 시설이 있다. 그리 큰 강이 아니지만 강물의 높낮이 차를 극복하고 배가 다닐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는 락 체임버(Lock Chamber)가 그것이다.
뷔르츠부르크를 관통하는 마인강은 프랑크푸르트를 통과하여 라인(Rhine) 강으로 합쳐져 네덜란드를 거쳐 북해로 흘러 나간다.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기적적인 부활과 성장을 상징하는 ‘라인 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라인 강을 따라 거대한 화물선이 다니는 것을 많이 봤는데 그 뱃길이 여기까지 이어지는 줄은 몰랐기에 상당히 놀랐다.
알테 마인교 위에서 강 건너편을 올려다보면 거대한 성채가 높은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서 있는 이 성채는 마리엔베르크 요새로 6세기에서 8세기에 언덕 위에 교회가 처음 건설된 후 성으로, 요새로 확장된 곳이다. 성채는 13세기부터 18세기에 뷔르츠부르크 레지던츠가 완공되기 전까지 수백 년 간 이 지역의 통치자인 왕자-주교가 거주하는 성이자 요새였다.
마리엔베르크 요새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이 아름답다고 해서 나는 아이들에게 요새까지 한번 올라가 보자고 했다. 지도로 보니 걸어서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시원한 저녁 바람에 걸어볼 만했고, 다음날은 바로 떠나야 해서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화를 불렀다.
와인을 한잔 해서 기분이 좋았던 아내도 호기롭게 가보자고 출발은 했으나 언덕 중턱부터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공교롭게도 시간이 시간인지라 요새 위에는 사람도 거의 없어 썰렁했고, 내외부에는 별다른 안내판도 없어서 야경을 보러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언덕 위에서 길도 약간 헤매야 했다. 모두들 이제 그만 가자고 투덜댈 무렵, 나는 '이제 오르막길이 끝났다'며 가족들을 요새의 정문 입구로 이끌었다.
마리엔베르크 요새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위에 걸쳐있는 돌다리를 건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시간 관계상 건물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성채 안의 뜰을 걸어 다니는 데는 문제가 없어 뷔르츠부르크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정문 반대편의 성벽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연신 '이 길이 맞느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따라왔다.
성벽에서 내려다본 뷔르츠부르크 시내는 마인 강 건너 짙은 주황색 지붕의 건물들이 넓은 평야 위에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모습이다. 방금 우리가 건너온 알테 마인교 위에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 와인을 즐기도 있었고, 그 뒤로는 뷔르츠부르크 대성당과 마리엔 교회의 첨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성벽 위에는 시원한 바람이 그만이었다. 나도 가족도 말을 잊고 아름다운 도시에 천천히 내려앉는 어둠을 지켜보았다. 성당 앞 광장에 등불이 켜지고 다리 위에도 가로등이 하나둘씩 들어오던 모습에 감탄하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주변도 어느새 캄캄하다.
그제야 우리가 요새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다는 점을 깨닫고 나가자고 아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숙소까지 걸어오는 뷔르츠부르크의 밤은 노란 조명 아래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