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에 걸려온 전화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전문의였다.
분명 방송은 잘 끝났는데 연락이 반갑지 않았다.
그는 촬영 차 방문했던 병원에서 우리 쪽 리포터에게
불편한 시선을 보내며 연락처를 물었고
녹화 전, 긴장된다고 손을 떨며
불안한 듯하더니 막상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능숙하게 토크를 마치고
“진짜 못할 줄 알았어요?!”라며
반전 웃음을 짓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상은 별로였지만 일로 만난 사이니까
도움 요청할 일도 생길 수 있어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그는 술을 마셨는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작가님~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근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사실 작가님 처음 봤을 때 놀랐거든요.
제 스타일이에요. 리포터한테 관심 있었던 게 아니라
작가님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이건 아닌데 싶은 취중고백이었다.
순간 어떻게 끊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진실성이 느껴지기보다는 뭔가 치근대는 느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작가님을
제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어요”
아뿔싸, 바로 끊었어야 하는데 이 말까지 듣고 말았다.
더 이상은 아니다 싶어서 전화를 대충 끊고
그동안의 상황을 곱씹어봤다.
촬영 날 반나절 정도 병원에 방문했고
서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으며
전화로 토크 내용을 상의한 정도라서
가까워질 틈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잘 웃거나 호응이 좋은 스타일도 아닌데
대체 왜?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혹시 내가 빌미를 준 게 아닌지 고민스러웠다.
다음 날,
불쾌한 기분을 덜어내고 싶어
선배 작가에게 상황을 공유했다.
선배는 이런 일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며
전문의와 점심식사 약속을 잡고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가벼운 대화 끝에
작가들은 출연자와 사적인 만남을 하지 않는다며
전화했던 일에 대해 사과해달라고 요구했다.
상대방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주면서
당당하고 세련되게 말이다.
전문의 역시 그날은 많이 취했던 것 같다며
미안함을 표현했고 이후 우연히 마주친 날에도
고개를 숙이며 나를 피해 갔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가끔 출연자들이 저녁식사 요청을 하면 멈칫할 때가 있다. 과거 내 마음을 잘 다독이지 못해 생긴 조심성 때문일까.
공격받으면 제때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느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