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령받은 첫 해, 신규교사 시절. 한바탕 교실이 돼지우리 마냥 엉망이 돼서 속상하던 날, 나를 위로해주던 동료 선생님이 말했다.
“선생님이 강냉이를 잘 보여서 그래요.”
“네...?”
손가락으로 이를 가리키셨다.
그 뒤로 나는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많이 웃어주면 만만한 선생님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때의 나는 착하다는 건 무섭지 않다는 말로 이해하고, 무섭지 않다는 건 교사로서의 권위가 없단 것으로 생각했었다.
학기초에 아이들에게 매번 설문조사를 한다.
'어떤 선생님이 좋나요?'
아이들의 답은 항상 비슷하다.
'착한 선생님. 재미있는 선생님. 친절한 선생님'
분명히 아이들이 원하는 건 착한 선생님인데.
생각해보니, ‘우리 반 선생님 착하다!’라는 말을 들을 때 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그저 만만한 선생님이 되는 것 같아서였고. 아이들이 원하는 건, 따뜻한 선생님일 뿐이다. 같은 단어인데 주파수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지금도 내가 맡은 아이들이 다른 반 친구들에게
“우리 반 선생님 정말 착해!”
라고 말하는 걸 자주 듣는다.
지금은 이 말이 반가워서 참 다행이다.
무조건 허용적인 부모가 좋은 건 아니듯이 균형이 참 중요하다. 따뜻하되 단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그 균형이 신규교사에겐 참 어려웠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생각해보면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아이들의 기억 한편에 따스함이 되어주고 갈아갈 힘을 실어주는 게 내가 생각하는 교사의 의무이자 행복이다.
그리고 내게 어울리지 않게 강냉이를 숨기려 애쓸 때와 나답게 강냉이를 다 드러낼 때 아이들의 표정을 비교해보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이 쌓이면서 단호한 것과 무섭게 하는 것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친절한 것과 쉬운 것의 차이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이제 강냉이를 다 드러내면서 아이들과 실컷 웃는다.
내가 해보니, 강냉이는 훤히 다 드러내도 된다.
교사가 웃지 않고 행복하지 않는데 아이들이 행복할 순 없지 않나. 혹여나 이전의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분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과 함께 최대한 많이 웃자고.
나의 경우 더 많이 웃어줄 때 아이들과 마음이 통했고, 신뢰가 쌓였고, 그때부터 단단하고 예쁜 관계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