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떠난 친구에게
삼일 전에 좋아하는 후배가, 아니 좋아하는 벗이 세상을 떠났다. 직장생활을 통해 알게 된 녀석이었다. 사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인간관계의 대부분은 직장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교 친구들도 종종 연락은 하지만,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는 현실에서, 새롭게 맺는 인간관계는 대부분 직장생활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녀석은 나보다 5살 정도 어린 녀석이다. 나보다 늦게, 내가 다니던 회사에 입사를 했고, 같은 팀이 되었었다. 사람 좋아하고, 술 먹고 떠드는 것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이었고, 그렇게 거의 15년을 알고 지내며, 같이 나이를 먹어갔다. 그 15년 동안 그 녀석도 나도 각자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도 했고, 귀여운 두 딸도 낳았다. 신기할 정도로 착한 녀석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싫은 말은 잘하지 못하고, 지가 힘들어도, 자기 일만이 아니라, 남의 일까지 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티 내지 않고, 항상 웃는 표정을 잃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어쩌다 화를 낼 때조차도, 아주 친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화를 내는 것인지, 그냥 과한 웃음과 제스처를 하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회사에서 야근도 자주 하였고, 야근 후에 보쌈에 소주 한잔 먹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3년 반 전쯤, 폐암 진단을 받았다. 진단 당시에 이미 뇌에 전이된 4기였다. 나에게 전화해서 '폐암인데, 이미 전이가 되었다네요. 당분간 휴직을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그 당시, 그 녀석의 첫째 딸은 다음 연도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3년 반동안 그 녀석은 정말 열심히 투병하며, 열심히 살았다.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는 휴직을 하였으나, 다시 복직하여 근무도 하였다. 치료 중에도, 몸 컨디션이 좋을 때는 가족들과 여행도 하였다. 고가의 비보험치료, 항암제 임상시험 참여, 해외(?) 중개인을 통하여 약물을 구매하여 복용, 그리고 폐가 아닌 다른 장기에 전이가 되어서, 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마지막에는 암으로 인한 통증으로 많이 힘들어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그 녀석은 안쓰러울 정도로 웃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수술을 받을 때에는 수술을 앞두고 야근도 하였고, 수술을 위해 입원해야 하는 당일에도 회사에 나와서 오전 근무를 하며, 자기가 맡은 업무를 하였고, 수술 후에도 입원실에서 노트북으로 회사일을 하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정말 바보같이 착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작년 12월에 퇴직하였다. 그리고 퇴직하고 한 달 하고 5일이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
그 녀석의 장례기간 중에, 꽤 많은 직장 동료들이 친구들이 조문을 하며 그 녀석을 그리워했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꽉 차지만, 정승이 죽으면 조문객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고 하지만, 그 녀석의 장례식장에는 그 녀석을 그리워하는 동료들, 친구들, 후배들로 가득했다.
우리나라에서 1999년에 개봉한 '원더풀 라이프'라는 영화가 있다. 당시에 본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솔직히는 매우 적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도 꾸준히 이야기되는 영화이다. 내가 내 인생의 영화를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원더풀 라이프를 꼽는다.
스포여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간단히 영화내용을 이야기하면, 죽은 망자들이 천국으로 가기 전에 머무는 역이 '림보'역에서 망자들이 일주일간 지내는 이야기이다. 이 림보역에서 망자들이 하는 일은 본인의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한 순간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찾아내면, 림보역을 떠나 천국에 갈 때에는 그 기억 이외의 모든 기억은 잊고, 그 한순간의 기억만 영원히 간직하며, 영원으로 떠난다.
사람들은 '인생의 황금기'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라던가, 내 인생의 황금기가 지났다라던가.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림보역에서 찾아내는 '영원히 기억할 단 하나의 순간'이야말로 '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닐까? 내가,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내 인생의 황금기'는 아마도 림보역에서 내가 영원한 기억으로 선택할 순간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다. 그냥 사회가, 남들이 나에게 '이런 것이 인생의 황금기이고, 이런 것이 인생의 성공이야'라고 어려서부터 주입시켜 준 내용에 따른 '오해'의 결과일 뿐일 지도 모른다. 진정한 내 인생의 황금기는 '내가 다른 모든 기억을 잊고, 단 한순간의 기억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 때, 내가 선택할 단 한순간의 기억'이 아닐까?
그 녀석은 폐암을 투병한 지난 3년 반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다. 물론 그전에도 열심히 살았지만, 난 그 녀석이 지난 3년 반동안 티 내지 않고 하나씩 차곡차곡 남겨질 가족들을 위해 준비를 해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항암치료의 고통 속에서도, 가족들과 한 순간이라도 같이 있으며, 추억을 만들기 위해, 한 순간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도, 통증에 정말 힘들어하면서도, 동료들이 보낸 카톡에, 본인이 아픔을 감추고 답을 한 것도 알고 있다. 속된 말로, 그 녀석의 지난 3년 반은 나 같은 사람의 35년보다 더 충실한 삶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녀석이 만약 지금 림보역에 있다면, 영원히 간직할 한 순간의 후보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를 너무너무 힘들어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후보 순간들의 대부분은 폐암투병을 한 지난 3년 반의 시간 중에, 가족과 보낸 시간들일 것 같다. 그래서, 그 녀석이 림보역에서 상담사에게 '도저히 한 순간만을 고를 수는 없으니, 내 인생에서 내가 죽기 전에 폐암에 걸린 이후, 가족들과 보낸 모든 시간을 영원한 기억으로 가져가고 싶다'라고 떼를 쓰고 있다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