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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솔 Aug 14. 2023

11. 좌절, 혹은 분노, 그리고…

_ 필요한 것은 내 내일을 내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닐까?

스마트폰으로 뉴스 기사를 보다 보면, 기사 말미에 관련 기사, 혹은 연관 기사가 계속 연결된다. 아마도 소위말하는 알고리즘으로 계속 연결되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뉴스를 타고 들어가다가, 어느 순간 추천 기사의 제목 목록에 ‘자살 사건’과 ‘묻지 마(?) 폭행 사건’ 이 같이 뜨는 우연(?)이 발생했다. 아마 최근 사건 사고 중에 뷰가 많은 기사를 리스팅 하면서 생긴 우연일 것이다. 그리고, 전혀 다른 성격의 사건 같지만 어찌 생각하면, 근본 원인은 비슷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계자료를 보면, 한국인 사망원인 1위는 암이다. 그런데 한국인 사망원인의 나이별 분석을 보면, 10세 ~ 39세까지의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다. 40세 ~ 59세에서 자살은 사망원인 2위를 차지한다. (2021년 기준) 기억을 더듬어보면, 자살에 관한 뉴스는 자주 접해왔던 것 같다. 나이대도 다양했고, 원인도 다양했었던 것 같다. 자살을 택한 이들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리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고 생각한다.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은 그분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만든 사회 구조나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예전에는 더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다며, 지금의 세태를 안타깝게 이야기하시는 분들도 계시는 듯하다. 물론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예전에 더 못 살았다’는 객관적 사실이기도 하다. (물론 개개의 상황에 따라,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나, 적어도 통계적 데이터로는 분명히 한국사회는 몇 십 년 전과 비교하여, 경제적 풍요를 이루었다. 상대적 빈곤감이나 빈부격차에 따른 심리적 요인은 고려하지 않기로 하자.) 그렇다면, 원인은 한국사회의 경제적 발전 외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사람이 좌절에 빠졌을 때, 그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나도록 하는 힘은, ‘이 상황을 내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거나, ‘어쨌거나 이 상황은 지나갈 것이고, 이 상황이 지나가고 나면, 다른 상황이 올 것이고 그 상황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인 것 같다. 사회가, 경제적 상황이 급성장하는 시기에는, 사람들 사이에 '현재의 내 나쁜 상황은 내가 바꿀 수 있다'라던가,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질 거야'라는 공감대나 사회적 믿음이 형성되는 것이 보다 쉬운 것 같다. 물론 빛이 밝을수록, 그늘은 더 깊은 법이지만, 눈부신 빛 앞에서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사회의 가치를 지배하고, 실제로도 사회는 급격한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눈부신 빛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모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이, 인간이 만든 사회도 끝없이 우상향 직선을 그리며 성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신호들에게서 눈을 돌려왔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코로나라는 눈 돌렸던 현실을 눈앞에 들이밀어 주었다.  이어서, 눈 뜨기 어려울 정도로 밝았던 빛이, 그 눈부심을 잃으면서, 보이지 않았던 짙은 그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그늘 안에 내가 있음을 알았을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내 힘으로 그늘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그늘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심지어 나를 둘러싼 그늘이 점점 더 넓어지고, 짙어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면, 그리고 이를 믿게 되었을 때, 좌절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좌절은 무기력이나 분노로 표현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 분노가 자기 파괴로 드러나거나,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것이 파괴로 표현되게 때, 자살 혹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폭력으로 폭발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개인의 성향으로, 혹은 질병으로 볼 수도 있다.(물론 그런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회가 파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전에 '사회적'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해결책이 '나 스스로, 지금보다 나은 삶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모든 사회구성원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않을까?


이 '희망'을 이야기할 때에는, 결코 '신화'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몇 백억, 몇 천억, 몇 조의 자산가가 된 '신화적 인물'을 이야기하며,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나 스스로, 지금보다 나은 삶을 만들 수 있다'라는 희망을 줄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삶'을 나 스스로 하루하루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못할 거야'라는 생각이 들고, '이 구렁텅이에서는 내 힘으로 탈출할 수 없어'라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 좌절과 분노라는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 그 속에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나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 수 있으며, 만들고 있다'는 희망, 그리고 이 희망을 바탕으로 한,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인 것 같다. '두 자릿수 이상의 고성장을 통해 다시 눈부신 빛을 만들면, 사회의 그늘은 다시 안 보이게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이제는 이룰 수 없는 미래를 꿈꾸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쉰둘의 취준생이 하루하루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도, '지금 이 어려운 시간을 버텨내면, 더 나은 하루하루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지금은 내 인생 2막을 위한, 내 자리를 찾기 위해서, 여기저기 부딪히고, 상처도 입고 있지만, 이 넓은 세상에는 분명히 나를 필요로 하는, 그리고 내가 필요한 자리가 있을 것이고, 지금은 그 자리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부딪히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야'라는 희망과 믿음. 그리고 자존감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열심히, 그리고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열심히 잘 살 수 있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확신한다. 아니, 확신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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