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1998년과 2023년 사이
‘장난이 아닌 걸 / 또 최고 기록을 깼어 / 처음이란 아빠 말을 믿을 수가 없어 ‘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왠지 익숙해서, 귀를 기울였다가 깜짝 놀랐다. 세상에나! 한스밴드의 ‘오락실’을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스밴드의 오락실’은 1998년에 발표된 노래이다. 우리 둘째는 2014년에 태어났고, 도저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 노래 어디서 배웠어?”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줬어.”
“그럼, 다른 친구들도 이 노래를 알아?”
“그럼, 우리 반은 다 알아. 그리고 다 좋아하는 노래야,”
“너도 이 노래가 좋아?”
“응. 얼마나 좋은데. 나 이 노래 우쿨랠레로 연습해서, 가을에 장기자랑할 때, 연주할 거야.” (우리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학기마다 장기자랑을 하는데. 모든 아이들이 참가한다. 노래 부르는 아이도 있고, 춤추는 아이도 있고, 퀴즈대회를 여는 아이도 있고. 나 개인적으로는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나에게도 장기자랑을 할 것이 있다는 자신감과 친구들도 모두 장기가 있다는 존중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 한스밴드의 오락실‘은 동요스러우면서도 흥겨운 멜로디이고, 아이들이 우쿨렐레로 연주하기도 비교적 쉬운 노래이어서,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가 좋아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이 이 가사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아빠도 이 노래 좋아해. 아빠가 대학교 졸업하고, 회사에 다닌 지, 2년쯤 되었을 때, 나온 노래거든. 근데, 이 노래 가사의 뜻 알아? “
“그러엄, 무슨 뜻이냐하면……“
둘째가 가사의 뜻을 설명하려고 할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초등학교 6학년인 첫째가 끼어든다.
“나도 학교에서 배웠어. 옛날에 아이엠에프라고, 나라가 많이 어려웠던 적이 있었대. 그때,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회사를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나온 노래래”
“나도 배워서 알거든.”
아마도, 학교에서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을 받았던 시기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스밴드의 오락실’을 배운 것 같다. 그런데, 노래 가사가 말하는, ‘아빠가 회사를 안 다니면서도,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싸서, 아침에 집을 나와서 오락실에 가는 이유’와 ‘오락실에 아빠들이 많은 이유’를 이해했을까? 그리고 지금 너희들의 아빠인 내가 ’취준생‘이라는 의미는 알까?
“아빠도 지금 회사에 안 다니는 건 알아? “
“그러엄. 난 아빠가 집에 있어서 좋아.”
“왜?”
“집에 오면, 항상 아빠가 있어서 좋아. 술 먹고 늦게 들어오지 않아서 좋고.”
“아빠가 회사 다닐 땐, 싫었어?”
“어~~. 출장 가서 다른 데서 잠자고 올 때, 선물을 사 와서, 그건 좋았지만. 그래도 아빠가 집에 있는 게 더 좋아.”
“그런데, 아빤 지금 다시 회사 다니려고, 여기저기 알아보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는데……”
“나도 알아. (잠시 생각하더니) 아빠, 작가가 되면 어때?”
“작가? 왜? “
“멋있잖아. 그리고 작가는 집에서 글을 쓰면 되니까, 계속 집에 있을 수 있잖아.”
“근데, 아빠가 집 계속 있으면, 우리 둘째 딸 방을 따로 못 만들어 주는데, 그래도 괜찮아?” (지금 우리 집은 방이 세 개인데, 안방, 그리고 첫째 방, 그리고 내 방, 이렇게 사용하고 있다. 둘째는 잠은 안방에서 같이 자고, 학교 다녀와서는 주로 마루에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한다.)
“괜찮아. 난 아직 어른들이 옆에 없으면, 무서워서 못 자고, 내 보물들 넣어둘 세 칸짜리 서랍만 하나 사주면 돼”
둘째와의 이 대화에 첫째는 끼어들지 않는 것을 보면, 첫째는 조금 더 ‘오락실’이라는 노래가사의 의미를, 그리고 지금 아빠가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둘째는 노래가사도, 지금 아빠의 상황도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아빠, 지금도 작가야. “
“그래? 아빠가 쓴 책 어디 있는데? 서점에서 팔아?”
“아니, 아빠는 종이에다 글을 쓰지 않고, 인터넷에 쓰고 있어.(우리 아이들은 아직 스마트폰이 없다. 첫째, 둘째 모두.)
“에이, 그럼 작가가 아니야. 아빠가 쓴 책이 서점에 있어야 작가지.”
“그런가? 아빠가 좀 더 글을 잘 써서, 서점에 아빠책이 있게 노력해 볼게.”
1998년과 2023년. 그 사이에는 25년이라는 세월이 있다.
1998년의 나는 직장생활 2년 차 신입사원이었다. 그리고, IMF구제금융이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되었고, 명예퇴직 또는 희망퇴직이라는 제도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직장 선배들이 희망하지도, 명예롭지도 않은 퇴직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회사에 남겨진 사람들은 보너스를 반납하며, 회사를, 그리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주말에도 출근하며, 열심히 일했었다.
그리고, 25년의 세월 동안, 희망퇴직이나 명예퇴직이라는 말은 모든 이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나만은 희망퇴직 대상이 되지 않기를’을 희망하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희망퇴직을 ’희망‘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리고, 난, 지금 희망퇴직을 하였고, 취준생이 되었다.
사회는 발전하였다. 25년 전의 선배들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은 환경에 있음은 분명하다. 희망퇴직자를 보는 사람들의 눈도 성숙하였고, 당사자도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재취업을 도와주는 제도들도 25년 전보다는 발전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오십 대 취준생에게 취업의 문은 매우 좁고, 끊임없이 취업의 문을 두드리던 오십 대, 육십 대들이 자영업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래도, 난 믿는다.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절대 놀며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았으며, 지혜를 쌓아왔다. 지식은 검색으로 찾을 수 있지만, 지혜는 검색으로 찾을 수 없다. 지식은 데이터가 대체할 수 있지만, 지혜는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데이터가 넘쳐나고, AI가 대세인 세상일수록, ‘지혜’는 점점 더 가치를 발휘할 수 있으며, 바로 이 ‘지혜’를 간절히 원하는 곳은 분명히 있다고. 세상이 넓다 보니, 내 지혜와 내 지혜를 찾는 곳이 만나기 위해, 좀 더 시행착오와 헤맴이 필요한 것이라고.
지금은 동네에 ‘오락실’이 없다. 대신 손 안의 스마트폰이 오락실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오락실에서만 시간을 보내면, 25년간 쌓아온 내 지혜가 퇴보할지도 모른다. 내가 할 일은 오락실을 나와서, 25년간 두서없이 쌓아온 내 지혜를 차곡차곡 예쁘게 쌓는 일일 것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닫힌 성으로 쌓아서도 안 되며, 완성해서도 안 된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커다란 문을 만들어 활짝 열어놓아야 하고, 새로운 지혜가 들어오면, 그 지혜도 성에 쌓을 수 있도록, 영원히 미완성인 성을 쌓아야 한다.
내일은 아이들과 오락실이 아닌, 도서관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