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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영 May 08. 2021

주홍빛으로 물결 지는 시간들

김시종 <희미한 전언>

 잘려나간 노을만이

 원풍경(遠風景)을 남기는 거리에서


- 김시종, <희미한 전언>, <<잃어버린 계절>>, 창비, 2019.




    고층 빌딩들 틈으로 해가 진다. 건물의 불규칙한 높이들에 잘린 노을은, 원풍경을 남기지 못하고 스러진다. 붉은 하늘 아래 그늘지는 아파트와, 그 아래 골목을 걷는, 지나간 나의 시간들. 흩어진 나날들은 왜 서쪽을 향해 가는가?


    오르락내리락 계단 같은 지평선을 건너 사라진 나의, 글이 될 수 있었던 사소한 기억들. 부풀려지고 부풀려져서 주인 되는 나를 짓누를 수 있던 그 기억들.


    나를 위한 글을 쓴지 근 반 년이 되었다. 지나온 날들이 무난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무난함이 아닌 무의미함이었으며, 글이 되지 못한 무의미함은 조금씩 도시의 바닥을 깎아내렸다. 빌딩과 하늘 사이는 멀어졌으며, 상대적으로 내가 디딘 땅은 융기하였다. 그렇게 나는 등반한 적도 없이 높은 산꼭대기에 섰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갑자기, 내 눈에 담겼다. 즐비한 건물들의 오르내림이 미미해진 이곳에서, 그것들의 존재가 무의미해지도록 일렁이는 노을이. 새로운 노을은 바다에서만 보일 수평선을 도시로 가져왔다.


    반듯이 잘려나간 노을이 비로소 남긴 원풍경을 나는 멍하니 바라본다. 무의미하게 흩어진 날들이 서쪽의 끝에서 만나고, 서쪽의 서쪽에서 모이며, 지평선을 바닥 삼아 스스로를 쌓아 올릴 때까지. 쌓고 쌓이며 쌓이고 쌓아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칠 때까지.


    그리하여, 과거들이 다시금 노을의 미학을 깨뜨린다. 과거의 탑(塔)이 역광(逆光)으로 그늘진 근풍경(近風景)이 되어 작다란 나를 가려간다.


    바벨(Babel)이라 이름 붙여질 도시. 나의 얼굴에 도시의 물결이 드리운다. (202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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