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영 Sep 25. 2021

무시케(Mousike)

김현 <빛은 사실이다>

 오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픈

 시를 쓴다


- 김현, <빛은 사실이다>, <<입술을 열면>>, 창비, 2018.



    골방에 틀어 박혀 시를 쓰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할 줄을 모르고, 곰팡이 슨 연필이 부러진다. 그러면 언제나 새 연필을 꺼내 든다. 남자는 시가 아니라 연필을 연마하는 것 같다. 삭은 연필은 부러짐으로써 연마의 끝이 보이므로.     


    골방의 밖에서 여자가 남자를 기다린다. 그녀는 골방의 문을 열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 왜, 그를 꺼내주지 않는지. 야속하여라.     


    남자는 연필을 소중히 다루는 법을 깨우치네. 어느새 바닥에는 몽당연필이 가득하고, 드디어 그는 나갈 채비를 하네. 누구라도 닳도록 사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밖을 나서네.     


    그가 문을 여네. 열쇠 없이도 문을 여네. 그가 밖을 나서자, 여자가 열린 문틈으로 골방에 들어가네. 여자가 문을 잠그네. 열쇠를 내다 버리고, 탁자 앞에 쭈그려 앉아 조용히 시를 쓰네.


    남자는 몽당몽당 닳아져서는, 시를 쓸 여력이 부족하고. 누구라도 사랑할 결의는 이제 오만(傲慢)일 뿐이고, 다만 그녀만을 사랑하기로 하였네.     


    그렇게 시는 슬픈 것이다. 죽어가는 여자를 사랑하여 슬픈 것이다. 남자는 골방을 등지고, 시를 쓰기 시작한다.     


    시를 사랑하였던 마음을 애상한다. (2021.09.25.)



이전 12화 별 헤는 밤중의 참회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