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리안
“어때?”
“조금 실망…. 비싼 가격에 비해서는 좀 별로다.”
남편과 나는 몬 통(Mon Thong)이라는 품종의 태국산 두리안을 먹으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미얀마 두리안은 태국산에 비해 씨가 크고 과육이 적은 편이지만 맛도 좋고 저렴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두리안 시즌이 아니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마트나 수입 과일 가게에서 태국에서 수입한 몬 통 두리안을 종종 사 먹는다.
가격은 키로당 13만짯~15만짯(현지 사설 환율로 4만 원~5만 원) 사이인데 1kg을 사면 우리 세 식구가 가벼운 저녁 식사 후 디저트로 먹을 만큼의 양이다. 미얀마 물가에 비하면 손 떨릴 정도로 값비싼 편이고 한국 물가와 비교해도 쉽게 사먹을 수 없는 금액대다.
(우리 럭키는 14개월된 한국 아기 중에서 가장 두리안을 잘 먹는 아기이지 않을까….)
우리 집 내니인 N이 냄새와 색깔을 보고 신중하게 고른 것을 사오긴 하지만 맛이 밍밍하거나, 덜 익어 서걱거리거나, 너무 익어서 물컹거리는 경우가 많다. 가격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다신 안 먹어야지, 다짐을 했다가도 두리안 특유의 풍미가 그리워 또 사버리고 만다.
이처럼 남편과 나, 그리고 우리 아기까지 열렬히 사랑하는 두리안이지만 놀랍게도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두리안의 강력한 냄새에 경악하는 수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첫 해외 여행지인 태국에서 맡게 된 그 지독하고 불쾌한 냄새는 이후로 숱한 먹을 기회에도 불구하고 두리안이라면 고개를 내젓게 했다.
그렇게 두리안의 매력을 알지 못한 채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2년 전 친언니들과 함께 우리 부부는 베트남 달랏으로 여행을 갔다. 저녁을 먹고 시장을 구경하다가 두리안을 특히나 좋아하는 둘째 언니가 과일 노점상에서 두리안을 샀다. 노점상 주인은 매섭게 생긴 두리안의 껍질을 뚝딱뚝딱 벗겨내고 튼실한 과육을 먹기좋게 꺼내주었다.
질색하는 우리 부부에게 언니들은 재차 시도해보길 권했다.(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걸 좋아하는 남편이지만, 어릴 때 두리안 냄새를 맡아보고 이후로 먹을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참 머뭇거리던 우리 부부는 신선한 두리안의 냄새가 생각보다 불쾌하지 않은 것에 용기를 얻어 조심스럽게 한 입 맛보았다.
바로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적당히 달콤하면서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가는 그 부드러운 풍미란! 달랏의 야시장 한복판에서 우리는 새로운 맛의 세계를 만났다.
어째서 두리안을 과일의 왕이라 부르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 날 이후 남편과 나는 두리안에 완전히 빠져버렸던 것이다.
“우리 저기 한 번 가볼까?”
연이어 몬 통 두리안의 맛에 실망했던 터라 두리안에 대한 애정이 조금 식어가던 즈음, 차를 타고 지나가다 집 근처에서 두리안을 파는 가게를 발견했다.
나는 근처에 정차해둔 차에서 아기와 함께 기다리고 남편이 N과 함께 두리안을 사왔다.
“말레이시아 두리안이랑 태국 두리안 둘 다 있던데 말레이시아 두리안 사왔어. 태국 두리안보다 조금 더 비싸더라.”
헉. 몬 통 두리안도 늘 비싸다 생각해왔는데 그것보다 더 비싸다니! (맛있는 음식에는 거침없이 돈을 쓰는 통 큰 남편 덕분에, 항상 가성비를 먼저 따지는 나도 울며 겨자먹기로 미식에 눈을 뜬다.)
그날 저녁 우리는 저녁을 간단히 먹었다. 리치한 맛의 두리안을 디저트로 먹을 땐 식사를 가볍게 하는 편이 좋다.
식사를 끝낸 후, 드디어 두리안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냉장고를 열자 두리안 냄새가 가득했다. 내가 두리안을 못 먹던 시절에는 맡을 때마다 역겨웠던 바로 그 냄새!
이 강력한 냄새 때문에 동남아시아의 많은 호텔에 두리안 금지라는 표시가 붙어 있다. 몇 년 전 우리 부부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풀먼 호텔에 살았었는데 다른 방에서 두리안을 먹으면 그 냄새가 환풍기를 타고 흘러 들어와 꽤 고통스러웠었다. 풀먼 호텔 역시 호텔 안에서 두리안 반입 금지된 호텔이었다. 누군가 냄새에 대한 컴플레인을 걸었는지 호텔 직원이 일일이 문을 두드리며 어느 방에서 두리안을 먹는지 찾아다니는 해프닝도 있었다.
말레이시아 두리안은 흰색에 가까운 옅은 노란색인 몬 통 두리안과 달리 아주 짙은 노랑이었다.
두리안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자마자 아기 식탁 의자에 앉아 있던 럭키가 제일 먼저 열렬히 반겼다. 어서 달라는 듯 손을 마구 휘저으며 응!응! 옹알이를 하며 호응한다.
가운데 씨가 있고 과육이 미끄덩한 두리안은 포크나 젓가락을 사용하기 어렵다. 깨끗하게 씻은 손으로 커다란 과육 하나를 집어들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 가득히 밀려들어오는 크리미한 달콤함!
와, 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달랏에서 처음 두리안을 먹었던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너무 맛있다.”
“비싼 값을 하네.”
감탄이 지나고 난 뒤에는 후회가 밀려왔다.
우린 말레이시아에서 무려 1년이나 살았다. 거기서라면 더 자주, 훨씬 저렴한 값에 이 맛있는 두리안을 실컷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조금 더 빨리 두리안의 매력을 알지 못했을까. 왜 조금 더 빨리 시도해보지 않았을까. 왜 조금 더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 부부는 열심히 두리안을 먹어치웠다. 럭키도 입가에 두리안을 뭍여가며 너무 맛있게 먹었다.
말레이시아 두리안도 앞으로 한 달 안에 시즌이 끝난다는 두리안 가게 주인의 말에, 가격이 부담됐음에도 몇 차례 더 사다 먹었다.
그런데 오늘 남편이 퇴근길에 사 온 두리안은 감탄을 자아냈던 그동안의 맛이 무색할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그나마 다른 때보다 양이 적은 것을 택해서 평소보다 비교적 저렴했기 때문에 속이 쓰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두리안에 대한 욕구가 한 풀 꺾일 정도로 못마땅했다.
역시 과일은 제철 과일이 최고인가보다.
예고 없이 쏟아지는 폭우와 습한 날씨는 싫지만 두리안을 생각하면 미얀마에 우기가 어서 왔으면 좋겠다.
싸고 맛있는 두리안,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돌고 설레는 기다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