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마시는 물에 대해 자유로워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정수기가 되지 않으면, 간이 필터가 달린 브리타를 사용하거나, 그것도 안될 경우에는 물을 사다 마시곤 했었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물의 무게감이 손가락을 타고 어깻죽지에 전해 져 오는 경험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지금과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오래전 여인네들이 옹이를 이고 물을 길어 다녔을 그 시절에도 물은 생존과 연결되는 그 진득한 삶의 무게를 우리네 머리 위에, 어깨 위에, 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 위에 올려놓았었다.
북유럽, 스웨덴이라는 이 나라에서 나는 오랫동안 익숙해져 왔던 그 무게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물로부터의 자유함과 해방감이 익숙하게 다가왔던 것은 아니었다.
스웨덴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학교 화장실의 손 씻는 물을 마셨다고 했을 때 놀랐던 일이 떠오른다. 목이 마르다고 이야기하니 화장실에 가서 물을 마시고 오라던 선생님의 이야기를 딸아이로부터 듣고 꽤 당황하였다.
“화장실 물 마셨어? 진짜? 선생님이 화장실에 가서 물 마시라고 했다고? 배 안 아팠어?” 라며 호들갑을 떠니,
“친구들도 다 화장실 물 마셔요!”라고 대답하는 딸의 말이 의심스러웠다.
화장실의 손 씻는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등교하는 아이에게 <그래도 화장실 물은 마시지 마라>는 당부를 하며 물병을 책가방에 넣어 주었었다.
스톡홀름의 한 시내에서 식사를 마치고 집까지 걸어가던 어느 날도 그랬다. 20분 정도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짜게 먹은 식사 탓인지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길가의 조그만 푸드카에서 물을 사려고 하는 데, 쾌활해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 물을 사려고 하는 거 보니 관광객이신가 봐요?”
“ 아닌데요. 저 여기 사는데요!”
“ 아, 그럼 오신지 얼마 되지 않았죠?”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스웨덴 사람들은 물에 돈을 쓰지 않거든요!”
“아….!”
“물 한 컵 드릴게요! 그냥 드세요!”
싱크대 안의 조그만 수도꼭지를 틀며 물을 건네는 아주머니에게 미소로 답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명의 근원! 깨끗하고 시원하며 청량한 물을 수도꼭지만 틀면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북유럽 사람들! 참 복 받은 사람들!>이다.
<스웨덴의 호수와 바다>
2년 전, 친한 가족과 노르웨이 숲의 허름한 산장을 빌리고 여행을 한 기억도 떠오른다. 주변이 블루베리 잡목으로 뒤 덮인 귀곡 산장 비슷한 곳이었는 데, 샤워 시설은 물론이고, 싱크대에서조차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산장 주인에게 연락하니, 집 뒤편의 우물이 있는 데 그곳에서 물을 퍼 쓰라는 것이었다.
남자 둘이 급히 우물물을 퍼 왔다.
“이 물을 마신다고?”
“응, 산장 주인이 마셔도 된대.”
결국, 남편이 제일 먼저 물을 마시기 시작했고, 덩달아 갈증이 났던 8명의 인원 모두가 그 물을 마시게 되었다. 물이 참 시원하고 달았다.여섯 살 어린아이부터, 함께한 가족 모두가 실컷 물을 마셨지만 그 물을 마시고 탈이 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뒷날 아침도 다함께 우물물을 마시고 대충 요기를 한 뒤 산장을 떠났다. 차로 한참을 가니 빙하가 떠내려 가며 만들어낸 노르웨이의 U자 피요르드 협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빙하 박물관 근처에서, 빙하에서 흘러내린 작은 빙하조각들도 맛보았다. 연 푸른 하늘빛 빙하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아그작 거리니, 가슴 가득 그 시원함이 전해 내려왔다. 북유럽에서 수돗물, 우물물, 빙하조각까지 맛보고 나니 새삼스럽게 물에 대한 고마움이 새록새록 다가온다.
<노르웨이 피요르드>
돌이켜 보면, 유년시절 우리들이 마셨던 물도 그런 맛이었는데... 모래 먼지가 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시원한 수돗물을 틀어내고 마음껏 세수하며 갈증을 풀었던 그때의 그 물 맛이 그리워진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일까?
집집마다 정수기가 있고, 동네 편의점마다 페트병 안에 생수가 즐비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물의 무게감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게 되어 버렸다. 스웨덴 사람들이 지켜낸 이 물로부터의 자유함을 전 세계의 어린아이들이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도 해 본다.
오염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수를 21세기에도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이 북유럽 사람들이 부럽다. 자연이 더불어 살아 숨 쉬는 북유럽, 호반의 나라 스웨덴에서 느껴보는 이 교훈이 조금은 쓰리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