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는 고3이다. 국어는 꽤 잘하지만, 수학은 아주 못하는 평범한 성적의 고3. 문제는 집중력이다. 집에선 동생이 떠들고, 학교 자습실은 자리 경쟁이 치열하고, 도서관은 예약이 밀려 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서울 지하철 2호선 내선순환을 탄다.
처음엔 그냥 자리 잡기 용이한 ‘이동식 독서실’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여기 생각보다 괜찮은걸?!
딱딱한 좌석에 앉아 출발하면, 자연스럽게 문제집을 펴게 되고, 3분마다 들리는 안내 방송은 집중이 흐트러질 타이밍을 잘라준다. 공기의 온도도 적당하고, 그리 시끄럽지도 않고, 흔들림은 오히려 졸음을 막아주는 리듬이 된다. 내선 한 바퀴를 다 도는 데 90분 정도가 걸리니 수학영역 모의고사 1회분 풀기에 안성맞춤이다. 고3의 야자 시간과 직장인의 퇴근 시간대가 겹쳐 사람에 치일 때가 왕왕 있지만 몇 정거장 참으면 나름 군데군데 빈자리가 생긴다.
C는 이 루틴을 매일 돌기 시작했다. 오후 7시 20분, 을지로입구역. 무단 야자를 감행하고 지하철에 탑승한다. 강남쯤 지나며 외국어 듣기 문제를 풀고, 신도림쯤 오면 국어 비문학 문제로 넘어간다. 8시 13분쯤 잠실을 지나며 샌드위치로 간단히 저녁을 때운다. 공부에 몰입하다 보면 시작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곧장 두 번째 루프에 돌입한다.
그날 밤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합정역을 지나던 무렵, 이상한 걸 눈치챘다. 바로 맞은편에 앉은 학생이 찬우와 똑같은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그 옆 사람은 수학의 정석을 정독 중이었고, 그 옆옆옆엔 외운 단어를 중얼중얼 따라 읽는 누군가도 있었다. 한 칸 안에 네 명. 전부 공부 중.
"너도 도는구나?"
어디선가 그런 말이 들렸다.
그들은 서로를 ‘루프족’이라 불렀다. 집에도 학교에도 정착하지 못한 공부 유랑민. 서울의 2호선이라는 커다란 원을 끊임없이 순환하며 최적의 집중 환경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
그들끼리는 몇 가지 묵계가 있다.
1. 공부 리듬은 역 간 거리로 나눈다.
2. 모르는 문제는 물어보면 서슴없이 가르쳐준다.
3. 정답률이 높으면 내리고, 집중이 안 되면 한 바퀴 더 돈다.
편의점 커피를 나눠 마시기도 하고, 지하철 노선도마다 오늘의 오답 노트를 표시하기도 한다. 어느 누구도 이름을 묻지 않지만, 모두가 서로를 이해한다. 여기선 혼자 공부해도 혼자가 아니니까.
이 공부법은 SNS를 타고 알음알음 공유되더니 SBS 8시 뉴스에도 나왔다. 어른들은 루프족을 두고 “요즘 애들은 공공 예절이 없어요 세금도 안 내는 것들이 쯧쯧”이라 인터뷰했고 2분할로 나눠진 화면 반절에는 C가 등장해 “어른들은 우리가 세상 돌아가는 법을 모른대요. 근데 여기 있으면 우리도 잘 보여요. 세상이 돌고 있는 게.”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이 영상은 릴스로 재가공되어 한반도의 모든 고등학생을 감복하게 했고 결국 국가 차원에서 루프족을 위해 서울교통공사와 교육청 주관, 이동식 독서실로 2호선 열차 한 량을 지정하기로 결정한다.
밤 12시. 마지막 순환. C는 오늘의 공부를 거의 마쳤다. 어깨가 무겁고 눈꺼풀이 슬슬 내려오려 할 즈음, 옆자리 여학생이 조용히 물었다. "혹시… 내일도 루프 탈 거예요?"
C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는 이상하게도, 조금 웃음이 났다. 지금 이 밤, 이 지하의 한가운데서, 그는 확신했다. 누구도 나 혼자만 버티고 있는 게 아니구나. 2호선은 느리지만 정확하게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을 맞춰 달린다. 원 안을 돌고 도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야경의 일부가 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