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가서 조용히 휴학계를 내고
병무청에 조기징집원을 냈다.
친구들이 대체로 4~5월 사이에 모두 입대를 했으니
나도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4월이 지나고 5월이 되어도 영장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의 절정기로
자원이 차고 넘쳐서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단다.
그래도 그렇지, 1982년과 1983년이 왜 이렇게 다른가.
분하고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공백기가 너무 길었다.
예고 없이 입대일 2~3주 전에 도착하는 영장을 기다려
매일 우체통을 열어보는 게 유일한 일과였다.
정말 무료한 대기 기간이었다.
이십 대 초반에는 대기 악령이 끼었는지
입대하고도 무려 보름 이상 훈련병이 되지 못하고
대기병 신세가 되었다. 이 모두 베이비붐 탓이다.
아무튼, 나만큼 대기가 길었던 친구는 없었다.
정말 군대 가고 싶었다.
학생도, 군인도 아닌 열 달이었다.
8월 초 드디어 영장이 나왔고
19일 꿈에 그리던(?) 논산 땅을 밟았다.
지금부터는 그 열 달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하려고 한다.
1983년 겨울에는 대학생 교통정리 아르바이트를 했다.
경찰청에서 마련한 아르바이트인데
운 좋게 선발되어 하루 네 시간씩 돈을 벌게 되었다.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고 재미있었다.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함께 일했는데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있어 좋았다.
우리 조에 여학생 한 명이 유일하게 있었는데
국문과 같은 학년 동기였다.
다른 친구들은 전부 동생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마침 여자친구도 없었고 해서
사귀자 어쩌자 별말은 없었어도 금방 친해져
커플처럼 돌아다녔다.
그의 꿈, 나의 꿈 이야기, 적당히 귀엽고 발랄한 아이였다.
편한고 좋은 기분이었다.
4주가 후딱 지나갔다. 아주 즐거운 아르바이트였다.
예쁜 여자애와 매일 네 시간씩 놀고 오는데
돈까지 벌 수 있으니 어떻게 재미없을 수 있을까.
그렇게 꿈같은 4주가 지나갔다.
그 친구와는 별다른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집으로 곧잘 연락해 왔다.
그 친구는 아직 4학년으로 매일 놀고 있는 나와 다르니까
섣불리 놀자 어쩌자 할 처지도 아니었고
언제 영장이 나올지 모르는데 사귀고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 친구는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나는 매사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연락이 오면 만나고, 만나면 즐거웠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그것이 최선이며 배려인 줄 알았다.
상대의 생각이 어떤지 물어봤어야 했다.
길어졌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생각보다 연재가 길게 갈 듯하다.
고작 열 달 동안의 이야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