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부동산 아저씨.
아무것도 가진 것은 없어도
패기, 하나는 살아 있었나 보다.
겁도 없이 달랑 단돈 800만 원 들고
장가들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아내와 둘이 합쳐서.
나도 나지만 아내도 참으로
미스터리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가진 것도 없고, 철도 안 든 나 같은 사람을 뭘 믿고
낯선 서울까지 좇아 왔는지 모를 일이다.
은행이라는 좋은 직장까지 그만두고,
나의 무모한 장담만 믿고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도 아니었다. 안양이었다.
“남자가 다 벌어먹이는 거다. 날 믿어!”
그 말끝에 아내는 미련 하나 없이,
시원하게 은행을 그만두고
천둥벌거숭이 나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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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만 원으로 안양에 얻을 전셋집은 없었다.
둘이서 며칠 동안
발품을 팔고 다녔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두 배는 있어야 한단다.
그런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다가 만난 분이
안양시 덕천마을 충북 부동산 아저씨.
땡볕에 온종일 돌아다녔더니
너무 다리가 아프고 목도 말라 들어간 곳이었다.
어차피 거절당한다 여기고
숨 좀 돌리고 하소연이나 할 겸.
1989
그 해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우리 사정을 찬찬히 들은 아저씨는
앉은 자리에서 전화 서른 몇 통을 돌리셨다.
“왜 이런 수고를?”
젊은 사람들이 딱해 보여서 그런단다.
부동산끼리 서로 연결하는 것 같았다.
“젊은 애들이 살려고 애쓰는 데 한번 찾아봐 줘!
소개비는 당신이 다 먹어!”
우리는 천사를 만났다.
며칠 후에 연락이 왔고
좋고 나쁘고 가릴 새도 없이,
수도꼭지 딱 한번 틀어보고 집을 계약했다.
2층 연탄보일러 집을 800에.
그곳에서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고 3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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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부동산 아저씨.
이문도 없이 베풀어주신 은혜, 어찌 잊을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보답은
3년 사는 동안 쌀 가게를 겸했던 그 집에서
쌀을 사 먹는 것뿐이었다.
다시 가보고 싶고 뵙고 싶은데
들리는 소식에
동네가 재개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단다.
1989년, 36년 전 일이다.
가난하고 생각은 짧았어도 그때가 행복했다던가 어쨌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