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들이.
요즘은 거의 사라진 풍습이지만
얼마 전까지도 자주 눈에 띄었던
번거롭지만 정감 넘치는 행사.
집들이란,
새집을 장만하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손님을 초대해 잔치를 하는 행사를 말한다.
이걸 해야 잘 산다던가 어쩐다던가.
신혼 시절, 우리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막상 행사를 치르자니 걸림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선 집들이를 치르기엔 집이 너무 좁았다.
열 평도 안 되는 집에 수십 명이 한꺼번에 앉을 자리가 없었고
결혼 직전까지 은행원이었던
아내의 음식 솜씨는 거의 빵점이었다.
과장 좀 해서 표현하면
총도 못 쏘는 민간인을 군복만 입혀서
전쟁터에 내보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분위기 상으로는 피해 갈 수 없었으므로
일단 날을 잡고 치르기로 했다.
집들이라는 게 어디 밥만 먹고 끝나나.
술 마시고 놀다가 흥이 돋으면 화투판까지 벌어지니까
거의 왼종일 치러야하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행사였지만
아내는 아무 불만도 없이 기분 좋게 맞이하겠노라고 했다.
아마도 은행원으로서 많은 집들이를 참석해 본 경험으로
직장인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행사라고 이해했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집들이 때문에 부부싸움도 많이 한다는데
우린 다행히도 즐겁게 맞이했다.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암담했다.
밥도 제대로 못 짓는데 그 많은 잔치 음식을 어떻게 할까.
결론부터 이야기하겠다. 잘 치렀다.
아내는 슬기로웠다.
대부분의 음식은 백화점 지하 음식 코너에서 사왔고,
국은 전화로 장모님께 도움을 받아 만들긴 했는데
빨간 국은 어려워서 못하고 소고기 탕국이 되어 버렸지만
사람들로부터 맛있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다.
협소한 장소 문제는 점심, 저녁 2부로 나누고
화투하고 싶은 사람은 인근 여관을 잡아 줘 해결했으나
그렇게 해도 방이 좁아
서서 식사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내가 회사 생활을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인근 인천, 서울 본사에서 까지 모두 오는 바람에
어마어마한 행사가 되어버렸다.
힘들고 당혹스러운 경우가 온종일 계속되었지만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흐뭇하기도 하고 마음 따듯해지기도 했다.
모두가 떠난 밤 12시, 산처럼 쌓여있는 설거지 더미.
우리 부부는 푹 절여진 파김치가 되었지만
밤을 새워 치워야 했다. 기분 좋게.
1989년의 일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내 집을 장만하고
수많은 집들이 기회가 있었지만
어떤 핑계를 대고서라도 다시는 집들이를 하지 않았다.
그립고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하고 싶지는 않은 1989 집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