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일
그렇게 아이는 모두의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
아이는 천생 여자 아기였다. 예쁜 얼굴, 목소리, 눈물, 배냇짓까지.
아주 잠깐 섭섭해 하셨던 아버지, 어머니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기뻐해 주셨다. 아이가 자라면서 예쁜 짓 하는 만큼, 아니 몇 배로 조부모로서 충분한 사랑을 주셨다.
출산을 하고 이틀인가 더 입원을 하고 아내는 바로 처가로 아기와 함께 퇴원을 했다.
장모님께서는 최소한 5주 동안 처가에서 산후조리를 해야 한다고 하셨고 같은 영남 북부 지방 문화를 공유하고 계시던 본가 어머니도 기꺼이 동의를 하셨다.
“5,7은 나야 집에 갈 수 있다.”
즉, 35일........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저렇게 예쁜 아이를 두고 어떻게 갈까. 아~~ 그래도 가야겠지. 아~~’
나는 짧은 상봉을 뒤로하고 일터로 돌아왔으며, 5주 동안 틈만 나면 안양에서, 청량리로, 안동을 왕복했다. 솔직히 힘든 줄 몰랐다. 꽃같이 예쁘고 귀여운 딸.
아기와 산모는 다행히도 아주 건강했다.
장모님 주관 아래의 아내의 산후조리 과정은 아주 놀랄 만 했다.
하루 일곱 차례의 식사, 세숫대야만한 미역국 그릇, 소금기 쪽 빠진 반찬들, 고봉밥, 조금의 잔반도 허용하지 않는 호랑이 같은 장모님의 엄격함. 그 자체도 대단했지만 묵묵히 따르는 아내도 대단했다. 그걸 매끼 먹어내는 그녀를 보며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찬바람을 쐬면 큰일 난다며 세수조차 방 안에서만 하도록 했다. 두문불출 35일이었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아내는 무려 15kg이나 살이 쪄 다이어트를 걱정해야 했다.
장모님 왈 “그렇게 해야 산후 후유증 걱정이 없고 젖힘이 생겨. 살은 다 빠질 거야!”
그 말씀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전부 다는 아니었어도 큰 노력 없이 살은 빠졌고 산후 후유증도 없었다. 장모님 말씀대로 삼신할머니께서 정성을 알아 주셨나?
물론, 덕분에 나는 아내 없이 그 기간 동안 홀로 지내야 했다.
35일 후, 초보 엄마 아빠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또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겠지.
우리가 가진 무기는 젊다는 것, 아이에 대한 애정, 책임감뿐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면 어머니나 장모님 도움 없이 오롯이 우리 힘으로 아이를 키워야 한다.
"아직 애 같은 우리가 과연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 따위의 불안감,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건강하고 예쁘게 자랄 아이의 미래를 떠올리며 모든 걱정을 덮었다.
“그래.... 할 수 있어!”
아이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