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재능이 어디 가겠어
"아. 왜 이렇게 웃겨."
"나 아는 사람들 중에 네가 제일 웃겨."
"그 순간에 그 말이 생각나는 게 신기하다야."
"센스 미쳤어!"
내 칭찬이다. 그렇다. 난 웃긴 여자다. 남들이 내가 하는 말에 웃어주는 게 기쁘고 행복하다. '하루 한 명 이상 나 때문에 웃게 하자'는 슬로건으로 살았던 적도 있다. 개그우먼을 해보라는 말도 들었지만 예뻐서 거절했다. 예쁘면서 웃기기 쉽지 않은데 난 그걸 해낸 웃긴 여자다. 이것도 웃기려고 하는 얘긴데 실제로 예쁜지 따져 묻지는 말기로 하자.
어떤 모임에서도 리더 역할을 많이 했고 내가 있어야 재미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칭찬으로 많이도 불려 다녔다. 에너지가 충분할 땐 그런 것들이 즐거웠다. 때로는 그런 일들로 내 에너지를 충천하기도 했다. 지금으로 보면 극 E성향인 것이다.
왕년에 한가닥 하지 않은 청춘이 어디 있겠냐만은 나도 젊을 때는 한 두 가닥쯤 했다. 학창 시절에도 전교 1등부터 일진까지 모두 친구로 지내는데 스스럼이 없었을 만큼 어느 누구와도 잘 맞춰 어울렸다. 부담스럽게 예쁜 것도 아니면서 같이 다니면 창피할 정도는 아닌 외모에 유쾌하고 즐거운 사람이었다고 지금까지도 믿고 있는 중이다. 나를 스쳐간 이들이 이 정도로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며.
나를 좋다고 따라다닌 어떤 남자아이가 있었다. 물론 한두 명은 아니었지만. 하하하!
"내가 왜 좋아?" 잔뜩 기대를 하고 물었다.
"웃겨서!" 이런 미친.
'예뻐서? 똑똑해서? 귀여워서? 현명해서? 좋은 거 많은데 웃겨서? 참나.'
그 길로 그 아이랑 연락을 끊었다. 갓 스무 살이 될 때쯤이었나. 그때는 웃겨서 좋다는 말이 그렇게 화가 났다.
사람들을 웃기는 건 좋았지만 내가 그저 웃긴 사람으로 비치는 것 같을 땐 심통이 났다. 그런 생각의 끝에 어떤 날은 '내가 피에로인가?' 싶기도 했다.
남들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 눈물짓는 피에로. 찢긴 입으로 남들이 보기엔 그저 늘 웃상인 웃는 남자처럼.
어렸다. 가치의 경중을 알아차리기엔 미숙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웃기는 여자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우스운 여자만 아니면 되는 거였다. 지금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하거나 심지어 웃기다고 하는 말을 가장 큰 칭찬으로 생각한다.
'똥꼬', '방귀', '코딱지' 이런 단어만 들어도 목을 젖혀가며 웃는 아이들을 본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보고도 까르르 웃음이 터지는 교복이 참 예쁜 학생들을 본다. 우리는 그렇게 웃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세월이 더해질수록 사람들은 잘 웃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웃기는 여자가 필요하다.
이 웃긴 여자가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웃음배터리가 가장 아랫칸에서 깜박이고 있다. 웃기는 능력도 웃는 능력도 기능저하 국면에 들어섰다. 극 E였던 나는 어느새 점점 I로 옮겨가 외롭지만 혼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타인에게 내 슬픔과 아픔을 전하고 싶지 않고 전염력이 강한 우울을 옮기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내 몫일 걸 말해서 뭐 하나 싶다. 값싼 동정은 사절이다.
그러다 보니 모두 나 같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작은 일에도 징징거리는 사람들을 공감하기 어렵다. 나는 암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자기 감기 걸렸다고 끌탕하는 인간의 유형이랄까. 어쩌면 남의 암보다 지금 자신의 기침이 더 걱정되는 게 인간이니까 그러려니 한다. 대신 그런 눈치 없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면 그만이다. 수술을 앞두고 있어 작은 말들에도 날이 선 나를 발견한다. 분명 그 사람은 그런 뜻이 아닐 텐데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웃기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알겠는데 삐뚤어질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특별한 재능이 없는 내게 그나마 조금 있는 게 아빠가 주신 웃기는 재능이다. 아빠는 병상에서조차 유머를 잃지 않았다. 분명 속상하고 분에 찰 일인데 웃음으로 승화시켜 떨쳐버리려는 모습,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던진 농담들이 웃겨서 더 슬프기도 했다.
아빠가 주신 재능이 지금은 저전압 상태지만 이대로 재미없게 살기는 싫다. 그 재능이 어디 가겠는가. 웃기고 웃으며 살기 위해 잠시 충전이 필요한 시점일 뿐이다. 가능하면 고속 충전이면 좋겠지만 저속으로라도 조금씩 채워가보자.
웃긴 여자, coming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