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ihiro Tsuru - Last Carnival
마지막 단추는 결국 회고다. 수많은 갈등과 괴로움에는 끝끝내 초연함이 깃든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본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불문율이라도 되는 듯이 그간의 감정들을 다시 어루만진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헐렁한 단추를 잠근다. 언젠가 달려있는 것들도 모두 다 떨어지겠지. 매만진 단추는 다시금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과정은 때마다의 짙은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축제를 감상하면서 진행된다.
몸이 아팠다. 평소 해오던 질긴 일정을 억지로나마 단축시켰다. 그리고 푹 쉬었다. 웃긴 일이다, 이 결정은 몸이 아프기 전에 했던 것이다. 무언가 예전보다는 체력이 떨어진 느낌이어서. 아니, 뇌와 신경이 받아들이는 피로가 훨씬 예민해진 것 같았다. 하나의 일을 끝마치고 나면, 더 이상 나아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첫 번째로 좌절된 일은, 의욕을 강제로 징집시키려 끈질기게 행했던. 운동이었다.
마음이 괴롭고, 싫증이 나고, 나태가 나 자신을 잡아먹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운동을 했다. 아니해야 만 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몸을 깨우려고, 아드레날린을 꼬인 헝겊을 더욱 쥐어짜는 모양새로 끄집어냈다. 이걸 행해야만 남은 것들을 해낼 수 있다. 첫 단추가 맺어지지 않으면 다른 것들은 허사가 된다. 설사 채워지더라도, 그 모양새는 주위에서 비웃음만을 당할 뿐. 그래서 어떻게든 해내려고 했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순간엔가 몸이 말을 듣지가 않았다. 무서웠다. 지금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지식이 가득한 친구의 말로는, 중추신경계가 백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평소의 반도 못 채우는 분량에, 할 때마다 졸음이 몰려왔다. 그렇게 최근에는 하루를 통으로 날린 횟수가 허다했다.
당분간 포기하고자 했다. 준비해야 하는 무언가도. 나를 깨우려고 발악했던 어떤 행위도. 나에겐 그저 멈추지 않는 생각의 유영만이 흐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써야만 하는 계획도, 모두 무산이 되었기에. 괴로웠다. 번뇌라는 말. 참으로 잘 만든 단어 같았다. 두꺼우면서도 까칠한, 극도의 어색함을 느끼게 하는 이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래도 흐르는 게 하나라도 존재하니까. 하류지로 나아가는 길을 더욱 매끄럽게 해주고 싶었다. 항상 겪는 일이지만, 그 깊이가 가늠이 안 되는 잠수일 때마다 듣는 곡. 'Last Carnival.'
이 곡을 처음 알게 된 건 어느 때였을까. 아마 진홍빛 미디어를 떠도는 중에, 하나의 문장에 홀려서 도달하게 된 곳으로 기억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인간실격. 아주 유명한 이 책에서 나오는 대사. 하지만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인간 내면의 극한과 이면을 담은 그 책을 추천받았을 때, 읽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기준과, 내가 세운 기준에서 거의 매일마다 실격하는 나 자신이었기에. 두 번이나 읽고 싶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미디어는 남 모를 공감을 선사한다고 한다. 그런데 암울과 괴로움이 가득한 방이라면, 두 개를 합쳐봤자 결국 그 규모만 늘어날 뿐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 미디어는 플레이리스트였다. 첫 번째 곡이 바로 이 곡이었다. 어디선가 한두 번 들어본, 그러나 직접 찾아 들으니 무척 생생했던 기억이 있다.
회색 구름이 가득한 무거운 날씨에, 빗물이 웅덩이의 부피를 머금고 쏟아지는 듯한 기분. 그 소리가 쓸쓸한 길거리에 튀어 파문을 넘은 진동이 일면서, 거니는 사람의 마음을 찢는 것 같은. 모든 사람의 가면이 벗겨지고, 지나간 일에 대한 눈물을 머금고 각자만의 회상에 빠지는 분위기를 가진 곡이다.
슬프게 깔리는 피아노와 회한을 담은 바이올린 선율은 사람을 감정의 거울로 내몬다. 왜 축제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축제란 보통 즐거운 일을 뜻하겠지만, 사실 인파를 모을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되지 않을까. 사람이 가지는 각자만의 축제에는 인파가 아닌, 무수한 감정이 모일 것이다.
그렇게 모인 것들이,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마음 구석구석을 휘젓고 뛰어다닌다. 아, 그러면 이 애잔하고도 아픈 선율에 이해와 공감이 생겨난다.
여하튼, 슬픈 곡이다. 말 못 할 감정과 족쇄를 차고 있는 이는 세상 사람 전부일테니까. 나는 글로써 표현할 수 있음에 무척 감사하는 입장이다. 족쇄를 끊어내진 못하더라도 어딘가 토해낼 창구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프다는 사실을 알릴 창구가 없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고. 그 사람이 얼마나 고독하고 슬플까 하는, 숨 막히는 공감이 겨우나마 닿는다.
카타르시스를 직접 끄집어내는 일은 다분히 부끄러울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삭히면 병이 된다는 문장도 있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침중한 상처를 소리 없이 간직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 곡이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눈물샘이 메말라서 그 주위가 갈라진다 한들.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단추는 잠가야만 하기에. 대부분을 내려놓더라도 다시 살아가려면 말이다.
나중이 아닌 아주 조금의 먼 미래에서, 그들의 깊었던 수렁이 무덤덤해지길 바라며. 잠깐의 축제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