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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춘 그 자리의 아련함

류이치 사카모토 - Merry Christmas Mr. Lawrence

by 훈자까 Mar 26. 2025

 여느 때와 같이 길거리를 거닐다가 덜컥 멈춰 서게 된 때가 있다. 어디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내 몸을 감쌀 때.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매혹적이라서, 잊을 수가 없었던 기억이 있다.


 흰 눈을 정말로 보기 어렵던 내 고향의 겨울날. 아직 그렇게 큰 키를 가지지 않은 나는 내리는 소박한 눈에 정신을 팔렸을 때였다. 그러던 와중, 한 피아노 곡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소름이었는지 모른다. 음악이 내 몸을 감싸준다는 이 문장이, 단지 글로만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음을 전해준 멜로디에 나는 그 흐름이 끝날 때까지 몸을 맡겼다. 끝으로 무척 아련해졌다. 다시 한 번 듣고 싶은데, 어디서 흘러나온 것인지도. 지금처럼 간단하게 검색할 수 있는 여유도, 인지력도 되지 않았으니. 그렇게 긴 시간 동안을 잊고 살았다.


 이제는 다 커버린 키가 익숙해지고, 오월에도 폭설이 내리는 도시에서의 모든 임무를 끝낸. 고향에서의 여유로운 하루였다. 그때도 작은 눈발이 흩날렸다. 목적한 카페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근처 다른 카페에서 그 곡이 흘러나왔다. 잠깐 멈칫하더니, 홀린 듯 그 카페에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죄송함을 무릅쓰고 금방의 곡 제목을 여쭤볼 수 있었다. 아, 제목부터 겨울이랑 무척 잘 어울리는 곡이구나.


 그때부터 나는 서린 바람이 불어올 시기가 오면, 일찍이 메리 크리스마스를 내 속에 담는다. 잊을 수도, 잊히지도 않는다. 추운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혹은 하얀 세상을 그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도입부의 귀를 간지럽히는 피아노 음이 마음을 울린다. 한순간에 고요해질 수 있는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높은 음이 끝나면 마치 숨 죽인 연못에 따스한 파문이 일듯이 잔잔한 음이 시작된다. 무언가 흐트러지는 게 아닌, 잠깐 그런 뒤에 확 나를 감싸는 듯한.


 어릴 적 나를 멈추게 했던 곡은 앨범 'Playing The Piano'의 곡이다. '1996', 최근의 'Opus' 앨범까지의 전반부는 흐르는 선율과 일어나는 속도에서의 차이감만 있을 뿐, 구성 자체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세 곡의 부분들 모두 매력적이다.

 



 중반부로 넘어가면 곡의 흐름이 달라진다. 특히 '1996' 앨범은 트리오 편성으로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가 함께 했다. 다른 두 앨범이 잔잔함의 진함과 깊이에서 전체적인 차이가 있다면, 이 앨범의 것은 확실히 다른 느낌을 준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합류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서정적이게 된다. 처음의 그 높은 피아노 때보다 더 아득하면서도 얇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조금 더 아슬아슬해진다.


 이후 후반부는 그동안 가라앉은 만큼 마음을 끌어올린다. 세 선율을 두드리는 그 소리 자체가 커진다. 마치 슬픈 분위기에 침체된 자신이, 어떤 계기로 이겨내고자 하는. 울음을 분출하면서도 결의에 찬, 고무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 트리오를 감상할 때마다 팔목에 돋는 소름은, 울컥함과 감격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눈물은 다 말라가고, 나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는 것 같은 클라이맥스가 다가온다. 끝인사에 담긴 세 악기의 떨림은 끝나지 않은 전율로 안내한다. 한 번만 감상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부드러운 강렬함을 지니고 있어서 또다시 빠져든다. 그렇게 몇 시간을 그 자리에서 듣는다.




 태어난 연도의 '1996', 상징성은 더욱 짙은 빛깔로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세 선율이 주는 특별함과 입체성은 내 모습을 대입하는 데 있어 퍽이나 즐겁다. 끝없는 입체성을 지향하는 나로서는 말이다.


 마지막에 일은 그 전율이, 인생의 장면의 끝자락에 담긴 짜릿한 무언가이기를. 격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과정을 만들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또 한 번 내 안에 곡을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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