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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자까 Oct 22. 2024

우울은 감수성이다

글작가에게 꼭 필요한

 언제부터였을까, 나에게 우울이 내려쬤을 때는. 글작가가 되려고 하는 그 순간부터 징조가 있었을 것이다. 자그마한 문장의 뼈대를 세우기도 어려웠던 시절, 답답함을 이겨내기 위해 독서를 시작했고 근질거림을 해소하기 위해 공상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면의 세상이 열렸다. 마치 깜깜한 밤과 같은.


 그 이후로 나에게는 별이 찾아왔다. 흔히 예술가들이 말하는 영감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것이 꼭 필요했다. 억지로 쓰려고 하면 팔이 저릿해 쓸 수가 없었다. 내 글에는 별빛이 담겨야 했다. 그래야만 만족스럽고, 발행이라는 결단을 마음에서 뽑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별빛은 우울이었다. 글을 적고자 하면 우울해야만 했고, 울적하니 글을 써야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세상은 별빛으로 가득했다. 찬란함이 만연해질 때면 토해내듯이 글을 썼다. 반짝이는 조각들로 하얀 벽돌에 스크래치를 내는 것처럼 말이다.


 내 눈을 가린 빛무리는 일상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현실보다는 상상 속이 좋았다. 마치 히키코모리나 방구석 몽상가가 된 것만 같았다. 시퍼런 빛은 적극적인 현실에 매번 제동을 걸어왔다. 나는 이것을 때때로 미워하되, 결국에는 더욱 사랑했다. 그렇게 우울은 지금까지 애증의 관계이자, 떨어질 수 없는 절친으로서 함께해 왔다.




 얼마 전 어느 작가님의 북토크에 참석했다. 그때까지는 단지 지망생으로서 북토크에 대한 순수한 궁금증이 전부였던 것 같다. 작가님은 일상 루틴이 지켜지지 않을 정도의 중증 우울을 앓으셨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전적으로 무기력한 그것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20대 때부터, 일상을 유지할 정도의 우울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작가님의 말씀에 흠칫한 기분이 들었다. 저 문장은 오롯이 나에 대한 설명이지 않은가.


 "글을 쓰는 사람의 감수성과 우울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뒤통수에 둔탁한 충격이 일었다. 얼얼하나 커다란 것을 깨우친 느낌이었다.




 이제껏 우울감은 나에게 약점이었다. 현실에서 극히 감성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나약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또한 아름다움과 행복을 파는 작가들을 무척이나 동경했다. 행복감 가득한 글을 쓰고자 해도, 시도에 그치거나 끝끝내 완성한 결과물에는 비소만이 일렁거렸다. 나는 글에 아름다움을 담을 수가 없었다. 단지 시퍼런 우울이 가득한 것들 뿐이었다.


 글에서만 세상빛을 받을 수 있는 녀석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독자에 대한 배려를 지우고자 했다. 난잡스럽고 칙칙하지만 따로 재단하기가 싫었다. 이 설원에서라도 본모습을 다 보여주길 바랐다. 설사 읽은 이들로 하여금 울적한 전염이 인다고 해도, 질끈 눈을 감을 뿐이었다.


 순수한 우울을 파는 작가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착각을 지우게 됐다. 스스로 단정 지어서 세상에 등 돌린 내가 부끄러웠다. 가끔 흉측스럽게 보였던 글조차 가면일 뿐, 순진하고 유려한 본모습이 남아 있었다.


 

 가을비가 내리고 몸을 적신 진흙향이 불어올 때면 사람이 감성적이게 되는 것처럼, 다양한 우울의 심미적인 감상을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감정의 난기류에 고통받는 이들을 다독이고 그들을 치유하고 싶다. 직시된 세상의 것들에 엉켜있는 내면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글을 담겠다.


 글작가에게 감수성은 우울이고,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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