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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라시아 횡단열차'를 타다니

by 하람

다시 움직였다. 중국 ‘베이징’을 출발해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쿠페’를 탔다. 쿠페는 한쪽은 긴 복도로 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4인 1실로 이 층 침대가 마주 보는 형태였다. 그러니 이 열차를 전혀 모르는 사람과 한 팀으로 탄다면 조금 불편할 수도 있다. 우리 일행은 성격 좋은 세 여자에 생존 영어가 가능한 남자 한 명이었다. 네 명이 한 칸을 차지했으니 완벽한 우리만의 세계였다.


여정은 몽골의 울란바타르역에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역까지 25시간을 횡단열차 안에서 보내는 것이었다. 광활한 몽골 대평원을 지나다가 수흐바타르역에 닿자 한 시간여에 걸쳐 몽골 출국 수속을 밟고 러시아 땅으로 들어섰다. 나우쉬키역에서는 장장 세 시간여에 걸쳐 러시아 입국 수속을 밟았다. 밀수자의 수신호 방지를 위해 창문의 커튼은 내려졌고, 군인과 탐지견이 밀수품을 찾는 동안 모든 승객은 복도에 도열했다. 나는 이렇게 러시아와 처음 만났다. 긴장감에 온몸이 빳빳하게 경직됨을 느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표정한 군인(혹은 경찰) 한 명이 우리 칸 침대에 올라서서 2층 침대 위 창틀까지 살폈고, 또 다른 군인은 탐지견과 함께 나타나 모두를 긴장시켰다. 여자 군인은 승객들을 우악스럽게 다루었다. 마치 범인 취조를 하는 것 같았다. 무표정하고 딱딱한 군인들로 인해 우리 얼굴은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울란우데역을 출발하고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창밖으로 바이칼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구간이 횡단열차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란다. 울울창창한 자작나무 숲과 가없이 펼쳐지는 바다 같은 호수 풍경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르쿠츠크역에는 다음 날 저녁에 도착했다. 긴 시간의 기차 여행이라 지루할 줄 알았는데 웬걸! 유쾌한 친구들 덕에 즐거웠다. 특히 유일한 남성인 홉쇠의 기상천외한 활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한참 웃고 떠들던 와중에 가방을 뒤적이더니 포장까지 완벽한 새 '오뚜기 토마토케첩'을 꺼내 들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왜? 어디 가려고?”

“갔다 와서 얘기해 줄게”

흡족한 얼굴로 돌아온 홉쇠는 기관실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왔노라 말했다. 어떻게 알고 준비했는지 기관사에게 최고의 선물이 오뚜기 케첩이란 말까지 덧붙였다.


예전에 인제군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을 다녀오며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은 어떨까 생각했었다. 막연히 상상하던 그 숲, 시베리아 앙카라 강변의 자작나무 숲을 걸었다. 찰랑거리는 잎사귀 소리에 마음이 상쾌했다. 여기서는 자작나무를 '하얗고 날씬하고 키가 큰 러시아 여자와 같다.'라고 비유한단다. 숲 속에 있는 건축 인류학 박물관 딸쯔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쉽게 딸찌 민속 목조 박물관이라 칭한다는데 우리나라의 민속촌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경쾌한 숲의 바람은 달콤했고 자작나무에 닿는 햇살은 사랑스러웠다. 마음속 찌꺼기가 모두 날아간 듯 개운했다.


바이칼호수는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깊은 담수호이다. 이 호수의 물은 유일하게 앙카라강 한 곳으로 나간다는데 나는 그 강을 거쳐 이곳에 도착했다. 자유여행의 힘이었다. 그 힘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구속하지 않았다. 함께 떠난 일행의 생각도 얼추 비슷해 어디를 가나 마음이 잘 맞았다. 그런 까닭에 무엇을 해도 거리낌이 없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배가 바이칼호수를 유유히 떠다녔다. 갑판에서는 이곳에만 서식한다는 물고기 ‘오물’을 구웠다. 이 생선은 특유의 향이 있어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해외에 나가면 그곳 음식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오물처럼 이곳이 아니면 먹을 기회가 없는 음식은 특히 그러하다. 당연히 마지막까지 오물거리며 먹었다.


호수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가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는데 불현듯 겨울에 다시 오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거렸다. 추운 러시아의 바이칼호수는 겨울이 더 어울릴 것만 같았다. ‘알혼섬’에 머물며 얼음 투어를 하다 보면, 왜 사람들이 바이칼호수를 ‘시베리아의 푸른 눈’이나 ‘시베리아의 진주’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호수의 너른 품은 계절마다 다른 색깔이겠으나 겨울에 더 돋보일 것 같다는 생각도 마음을 흔들며 돌아다녔다.


내가 찾은 6월의 바이칼호는 잔잔하고 고요했다. 적당히 흐린 날씨는 계절이 무색하게 추위를 몰고 왔지만, 어쩌면 내게만 적용된 추위일 수도 있겠다. 호숫가에서 온몸을 들어낸 채 선탠을 즐기는 현지인들과 패딩으로 추위를 피하는 내가 같은 값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망중한이 곧 내 것과 같다고 여겼다. 어디나 사람 사는 모습은 같다. 각기 마음 그릇이 다를 뿐이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내 마음의 눈이 좀 더 밝아졌으면 좋겠다. 이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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