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 땡볕, 습도... 견딜 수 있나요?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토요일 새벽부터 오전까지 비가 내렸다 안 내렸다 하늘이 변덕을 부리고 있었으나, 오후에는 비가 그친다는 일기예보를 우린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오전엔 온 가족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기대한 대로 비가 그쳐 있었다. 하늘의 색깔도 내가 바랬던 회색빛이었다. 지난 주말 낮에 땡볕을 그대로 맞고 뛰면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남편과 나는 비가 그치고 난 뒤 구름이 햇빛을 가려주는 걸 원했던 것이다. 딱 지금이 러닝을 하러 나가야 할 타이밍이라며, 우리는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20km 정도 천천히 달려보기로 했다. 나는 6분 30초 페이스로 시작해 6분 페이스로 유지하며 달려볼 계획이었다. 많은 비가 오진 않아서 길바닥에도 물이 고인 곳이 많지 않아 크게 미끄럽진 않았고 달리기엔 괜찮았다. 우리가 자주 가는 코스인 집 근처 체육관에서 시작해 바닷가 해변도로를 거쳐 하천길로 갔다 오는 코스로 뛰고 있는데, 왠지 시작부터 몸이 찌뿌둥한 것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한 참 움직이다가 달리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1km 정도 달리면 몸도 풀리면서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속 이어 나갔다. 하지만 1km 다 뛰기도 전에 벌써 숨이 턱턱 막히고 다리가 무거워져, 앞서 가는 남편 뒤에 붙어가기도 힘들었다. 시계에 뜨는 내 속도를 확인해 보니, 7분 30초 정도의 페이스로 뛰고 있었다.
지난주, 땡볕에서 30km를 달릴 때도 이렇게 초반에 힘들지는 않았다. 이어서 2km, 3km를 달려봐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머리가 띵 하고 속이 답답해졌다. 그렇게 바닷가에 다다랐을 때 남편이 잠시 멈추길래 나도 멈췄다. 나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니, 오늘 처음부터 왜 이렇게 힘들지?"
"습도가 너무 높아서 그런가 봐~"
그렇다. 비가 오다 말다 하면서 바깥 습도가 높아져 있는 상태에 온도도 높은 편이었다. 장마철 같은 습한 여름날에는 밖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고 몸이 끈적해져 기분까지 나빠지는 상태를 많이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오늘은 그냥 흐리고 선선한 날이 아니라, 습하고 후덥지근한 날이었던 것이다.
남편은 힘들면 20km까지 뛰지 말고 나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 진짜 지금 몸상태로는 20km는커녕 10km도 못 뛸 것 같았다. 아니 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1년 넘은 러너의 자존심(?)에 5km는 채우고 싶어 조금 더 달리겠다고 남편 뒤를 따라갔다. 그러는 동안 신기하게도 초반에 괴롭히던 두통과 메슥꺼움이 조금씩 사라졌고, 숨이 차는 것도 나아졌다. 이제 이 날씨에 몸이 적응하기 시작한 것일까? ㅎㅎ 이제 살만하니까 나의 생각도 바뀌었다. 이왕 장거리 러닝을 하러 나온 거 10km 이상은 찍고 가고 싶어, 나는 돌아가지 않고 계속 달렸다. 물론 속도를 더 높일 수는 없었기에, 남편과의 거리는 불러도 못 들을 만큼 많이 멀어지기는 했다.
13km 정도 되었을 무렵 남편이 달리기를 멈추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너무 늦어서 기다려 주는 건가 싶어 좀 더 힘을 내서 달려가니, 도저히 안 되겠다며 음료수 하나 먹고 가자고 했다. 꿀맛 같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눠 마시면서, 결국 우리는 20km를 채우지 못하고 걸어갔다. 남편도 오늘 날씨는 정말 몸을 지치게 해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나보다는 멀찍이 앞서 갔기에 그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래도 그 정도 달릴 수 있는 것도 나에게는 대단해 보였다.
나에게 습도는 땡볕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달리는 동안 마치 무거운 곰 한 마리가 어깨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러닝이 날씨에 민감한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더운 것보다 습도가 높은 것에 더 취약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었다. 만약 대회날 이런 날씨라면 최악이지 않겠냐고 남편에게 말하자, 지난 상반기에 뛰었던 대회날도 오늘과 비슷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날은 긴장감과 대회 빨(?)로 힘듦을 덜 느꼈던 것일까? ㅎㅎ 아무튼 날씨에 따라 러닝의 성과는 달라지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좋은 날만 골라서 달릴 수는 없다. 오히려 다양한 상황을 경험해 보면서 요령을 터득하는 게 우리에겐 더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오늘만 달리고 말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의 성과를 확인하는 대회날의 날씨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그야 말고 복. 불. 복. 이니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