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능력을 끝까지 쥐어짜본 적 있나요?
나는 이번 대회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면서 그것을 느껴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짰다는 것을... 한동한 숨이 턱까지 차올라 호흡하기가 힘들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리고 끝났다는 안도감과 목표를 달성했다는 행복함이 섞여, 내 온몸은 도파민이 넘쳐흘렀다. 힘 빠진 다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치 구름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1년 반 정도 러닝을 하면서 나름 다양한 대회에 참가해 보았고, 그때마다 가지는 마음가짐은 늘 똑같았다.
'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그날의 컨디션은 매번 달랐지만 나는 한 번도 완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대회 때마다 기록을 조금씩이라도 높이는 것이 목표였고, 한 두 번을 제외하고는 그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실력과 체력의 한계를 깨닫게 되기도 했다. 대회 빨(?)로 초반에 아무리 잘 달려지더라도, 후반에는 늘 다리가 무거워지고 몸이 쳐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빌드업은커녕 평균페이스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마지막에 전력질주 하리라는 다짐은 늘 무산되었고, 겨우 지친 다리를 끌고 가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이번 대회는 러닝 2년 차 여름훈련을 끝내고 처음 참가하는 하반기 대회였다. 우리는 러닝 크루 같은 곳에 소속되지 않고 늘 남편과 단 둘이 훈련을 하지만, 올해는 나름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했던 것 같다. 작년에는 그저 자주 러닝 마일리지를 채우는 것에만 목표를 두었다면, 올해 상반기에는 다양한 거리주, 스피드 훈련, 산에서의 훈련 등 매일 조금씩 바꿔가면서 훈련을 진행했다. 이것은 남편이 약 2달간 러닝 프로그램을 신청하여 경험해 보고서 바뀌게 되었다. 매주 훈련 프로그램을 받고 하기 싫어도 숙제처럼 하다 보니, 본인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에도 비슷하게 해 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열심히 하는 러너들이라면 이렇게 힘든 여름훈련을 잘 버티고 난 후, 가을 대회에서 실력이 향상되었음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일명 '가을의 전설'이 되는 것을 모두들 기대하며, 그 성과를 위해 덥고 힘들어도 여름 러닝을 쉬지 못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그래서 가을 첫 대회에 거는 기대도 컸다. 하지만 아직 낮에는 제법 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고, 평균 페이스가 좀 더 빠르게 줄여졌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대회 전날 가볍게 조깅을 하면서 마지막에 빠르게 뛰어 본 결과, 당혹스러웠다. 나는 5:00 정도 되겠지 하고 느껴졌던 평균페이스가 5:30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스피드 훈련이 부족했던 것일까? 여름 전의 실력만큼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그동안 경험했던 '대회 페이스'를 믿고 10km 대회장으로 갔다. 같은 부산 안이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해서 새벽에 출발해야 했다. 직장인인 남편과 나 둘 다 일이 많았던 한 주여서 피로가 쌓이기도 했고, 혹시 못 일어날까 봐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잠도 좀 설친 상황이었다. 그래서 졸린 눈으로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그들이 보였다. 벌써 가슴에 번호표를 붙이고 러닝 복장으로 앉아있는 사람들...ㅎㅎ 그들을 만나니 속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밖으로는 티를 내면 안 되니까 ㅎㅎ)
'참, 러닝 이게 뭐라고 다들 새벽같이 일어나서 대회장으로 가고 있구나. 저분들도 오늘을 위해 여름 동안 열심히 달리고 왔겠지?'
지하철에서 내리고 대회장으로 걸어가다 보니 더 많은 참가자들의 행렬이 보였다. 벌써부터 느껴지는 대회장의 분위기에 컨디션이 살아나고 실력에 대한 걱정도 사라져 버렸다. 그저 또 대회에 참가한다는 생각에 설레고 즐거워졌다.
대회 진행도 순조로웠다. 이 장소에서 처음 열리는 본격적인 마라톤 대회였고, 공원을 계속 도는 코스라 사람들이 몰릴까 봐 걱정했는데 별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힘든 업힐 구간도 없었기에 그냥 나만 열심히 하면 되었다. 우리는 최대한 앞쪽에 서서 출발을 했고, 서로 페이스가 달라 곧 헤어졌지만 각자 최선을 다해 달려갔다. 나는 초반 1, 2km 때 무조건 사람들 사이를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전속력으로 달렸고, 그랬더니 4:40 페이스가 나왔다. 역시 대회 빨은 다르다는 걸 또 한 번 느끼면서 '나 오늘 왜 이렇게 잘 되지?' 하는 생각에 들떠 있었지만, 그건 잠시였다.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체력이 소진되어 점점 5:00 페이스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넘어갈 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속도를 높여보면서 5분 페이스 안으로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래야 오늘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작할 땐 흐렸던 하늘이 점점 구름이 걷히면서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후반부에 가까워지면서 바닥나는 체력에 햇볕까지 쌩으로 받으며 달리려니 더 힘들어졌다. 평소에 10km는 늘 별 무리 없이 뛰곤 했는데, 이렇게 헉헉대고 있다니 ㅠ.ㅠ 그래 그건 조깅 수준이었고 지금은 속도가 다르다. 왜 그동안 빠르게 뛰는 연습을 더 하지 못했는지(힘들어서 자꾸 미루기만 했었지ㅠ.ㅠ)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였다. 약 2km 정도를 남기고 반환점을 돌아가는데 대회 스텝으로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내 번호를 보고 메모를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뛰는 내내 주변엔 여자 참가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순위권에 있는 건가 하는 허황된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 덕에 조금 더 힘을 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마지막 1km 구간이 되었다. 늘 대회 때마다 마지막에 전력질주를 하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절대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해 왔다. 그때쯤이면 다리는 돌처럼 무거워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 빨리 달리고 싶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앞에 쌓아놓은 게 있느니 그저 '끝까지 걷지 않고 저 결승점까지만 들어가자'는 마인드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변수가 있었다. 아까 만났던 내 번호를 적던 스텝 때문인지, 내 앞에 여자 선수 2명이 보이자 욕심이 솟아올랐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 2명은 제치고 가리라!!'
분명 아까는 더 이상 짜낼 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왔는지 모를 힘으로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악 물고 열심히 팔을 휘저으며 말 그대로 전. 력. 질. 주.를 하며 그 2명을 앞질러 갔고, 그렇게 결승점까지 들어갔다. 녹초가 된 나를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웃으며 반겨주었다.
"잘했다, 잘했어~ 기록 단축 성공했다!!"
그렇게 나는 이전 기록보다 3분 5초를 단축했고, 처음으로 여자 순위 10위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