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가스라이팅의 증거
Chapter 1: 완벽한 연인
2025년 3월 12일.
"제발... 제 동생 좀 구해주세요. 제 동생이...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어요."
의뢰인 이선영은 절박했다. 그녀의 동생 이수영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는 그녀는, 최근 유명 건축가인 최강혁과 결혼했다. 최강혁은 젠틀하고 유능하며, 아내를 끔찍이 아끼는 완벽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언니인 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불안해 보였다. 수영은 결혼 후, 활달하고 자신감 넘치던 예전의 모습을 잃고 점점 더 위축되고 불안해했다. 그녀는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남편 없이는 외출도 하지 않았으며, 사소한 실수에도 극심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얼마 전엔 동생이 저한테 그러더군요. '언니, 내가 요즘 너무 예민한가 봐. 자꾸 잊어버리고 실수해서 강혁 씨를 힘들게 해. 나는 정말 문제 있는 사람인가 봐.' 라고요."
선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말을 듣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그건 제 동생의 목소리가 아니었어요. 마치... 누군가 써준 대사를 억지로 읊는 인형 같았어요."
선영은 동생이 남편 최강혁에게 심리적으로 지배당하고 있으며, 이것이 교묘한 '가스라이팅'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물증이 없었다. 최강혁은 대외적으로 완벽한 남편이었고, 수영 스스로도 남편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폭행이나 폭언의 흔적도 없었다. 이것은 상처도, 증인도 없는 완벽한 밀실 범죄였다.
Chapter 2: 소리 없는 감옥
"가스라이팅은 피해자 스스로가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어 자존감을 파괴하고, 가해자에게 완전히 의존하게 만드는 가장 교묘한 형태의 정서적 학대입니다."
이번 사건은 한 사람의 내면을 구출해야 하는 섬세하고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인간 심리의 대가인 프로파일러 강태우와 심리학자 오민재가 이 사건을 맡았다.
전직 프로파일러이자 팀의 리더인 강태우는 먼저 최강혁이라는 인물을 분석했다.
그는 겉으로 완벽해 보였지만, 그의 주변인들을 탐문한 결과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과 능력을 과시하기를 좋아했고, 타인의 사소한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나르시시스트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타인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도구로 여기죠."
강태우가 분석 자료를 펼쳤다.
"아내인 이수영 씨는 그의 완벽한 삶을 장식하는 가장 아름다운 트로피였을 겁니다. 하지만 트로피에 작은 흠집이라도 나는 건 용납할 수 없었겠죠. 그는 아내를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완벽함을 유지하려 했던 겁니다."
한편, 오민재는 언니 선영의 도움을 받아 수영을 만났다. 수영은 처음에는 남편에 대한 비난에 강하게 저항했다.
"강혁 씨는 날 사랑해요. 내가 부족해서 그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그녀는 이미 가해자의 논리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다.
오민재는 섣불리 그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수영의 '기억'에 집중했다.
그는 수년간 자살 예방 상담을 하면서,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의심했다.
"수영 씨, 혹시 최근에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약속을 잊어버린 적이 많지 않았나요?"
"네... 맞아요. 제가 요즘 정신이 없나 봐요. 강혁 씨의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릴 뻔하고, 시댁과의 약속도 잊어버려서... 그럴 때마다 제가 너무 한심해요."
오민재는 수영이 스스로를 탓하는 모든 사건들이, 사실은 최강혁에 의해 교묘하게 조작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했다.
수영은 혼란스러워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작은 의심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Chapter 3: 녹음된 진실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녀가 스스로 깨닫게 할, 명백하고 반박할 수 없는 증거 말입니다."
강태우의 말에, 언니 선영은 동생에게 작은 녹음기 하나를 몰래 건네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녹음기에는 가스라이팅의 실체가 고스란히 담겼다.
녹음 파일 속에서, 최강혁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수영아, 왜 그랬어. 내가 그 서류 얼마나 중요하다고 말했어. 당신은 가끔 보면, 일부러 날 망치려고 작정한 사람 같아."
(수영: 아니야, 강혁 씨. 미안해. 내가 정말 왜 그랬을까...)
"됐어. 당신한테 뭘 기대하겠어. 나니까 당신 같은 사람이랑 살아주는 거야. 다른 남자였으면 벌써 당신 버렸어."
(수영: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야. 당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니까. 알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비난, 걱정하는 척하며 심어주는 죄책감, 상대를 고립시켜 자신에게만 의존하게 만드는 교묘한 화술. 녹음 파일은 완벽한 가스라이팅의 교본이었다.
오민재는 수영에게 이 녹음 파일을 들려주었다. 자신의 목소리와 남편의 목소리를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듣게 된 수영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건... 사랑이 아니었어."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갇혀 있던 소리 없는 감옥의 문을 스스로 열고 나왔다.
Chapter 4: 나의 목소리
수영은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녹음 파일은 정서적 학대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최강혁의 완벽한 가면은 산산조각 났고, 그의 사회적 명성도 무너져 내렸다.
이혼 후, 수영은 오랫동안 심리 치료를 받았다.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을 되찾는 과정은 길고 힘들었다.
그녀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작은 원룸을 얻어 독립했다.
어느 주말 오후, 그녀는 자신의 방을 청소하다가 먼지 쌓인 기타를 발견했다.
결혼 전, 곧잘 치곤 했던 기타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기타를 들고 줄을 튕겼다. 서툰 소리가 났지만, 그것은 분명 그녀 자신의 소리였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오랜만에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햇살이 그녀의 어깨 위로 따스하게 쏟아져 내렸다.
아직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더 이상 누구의 대사도 읊지 않는, 온전한 그녀 자신의 목소리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속삭임은 때로 가장 잔인한 흉기가 된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