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23.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어

다시 양곤 첫째 날

by 오늘윤

2019 10월 30일



양곤 센트럴 레일웨이 스테이션


미얀마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고 10일이 넘는 기간 동안 3일에 한번 꼴로 배낭을 메고 이동을 다녔던 여행이라 사실 피곤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기질이라는 건 무서워서 마음으로는 오늘은 좀 늘어져서 푹 쉬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몸을 쉬이 놔두질 못했다.


다음으로 움직인 곳은 순환열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있던 곳에서 약 1km 떨어진 곳이었다. 오후 2시, 한창 더위가 절정에 다다를 시간이라 그런지 더위에 유독 약한 내게 가는 길이 천리만리 같았지만 그래도 그 끝은 있다고 저 멀리 막 들어온 기차의 모습이 보였다.



기차에 JR이라고 적힌걸 보니 일본의 중고 기차를 사서 운행 중인 모양이다. 막상 기차를 보니 더위에 풀렸던 맥이 다시 살아나는 듯 다리에 힘이 붙었다. 물론 저 기차만 뱅뱅뱅 타고 돌다 올 생각은 아니었다. 저 순환열차를 타고 '다닝 곤 시장'에 내려 좋아하는 시장 구경을 할 계획까지 생각해두고 있었다. 좀 전에 더위에 지쳐 피로 누적으로 숙소에서 푹 쉬는 게 어떨까를 고려했던 사람 치고는 일정이 너무 알차게 준비되어 있긴 했다.


양곤 센트럴 레일웨이 스테이션


양곤 기차역에 드디어 도착했다. 기차역의 건축 양식이 유럽의 성들이 생각나면서도 지붕의 장식에서는 파고다가 떠오르는 복합양식의 느낌이 나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기차 안에 들어가자 또 떠오르는 기시감, 인도 기차역에서 보던 풍경과 너무 닮아 있었다. 너도나도 바닥에 앉거나 드러누워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 가운데서 식사까지 하는 모습이며 어느 한 가지가 닮았다기보다 전반적인 모습이 인도를 떠올리게 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미리 알아온 플랫폼으로 찾아가 기차 운행 시간표를 찾았다. 생각해보니 꽤 준비를 많이 해서 찾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기차 운행 시간표는 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도착하고 나서야 떠올라 슬쩍 불안해지고 있었다. 시간표는 찾았는데 시간이 좀 이상한 느낌...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맞는 듯했다. 그래도 믿을 수 없어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분께 물어보니 시간상 아까 오면서 보았던 그 기차가 내가 놓친 기차였던 모양이고 다음 기차는 2시간 반 이후에나 온다고 하는 맥 빠지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오기로 2시간 반 뒤의 기차라도 타볼까? 잠시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굉장히 무리수를 두는 생각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여행을 다니며 배운 게 있다면 여행은 마음대로 계획되는 게 아니라는 것, 미련도 집착도 아쉬움도 너무 오래 가지고 있을수록 여행에 대한 추억만 망칠 뿐이라는 걸 몇 번 되지 않는 여행으로나마 배운 교훈 중 하나였다.


해봤자 남는 것도 없는 상심 따위는 훌훌 털고 기차역을 빠져나오기로 했다.

물론 칼로 무 자르듯 깨끗하게 아쉬움이 잘려 나가는 건 아니라 몇 번이고 뒤돌아 보긴 했지만 아쉬우면 아쉬운 만큼 꼭 다시 찾아야지 라는 결심을 더 강하게 굳히기로 했다.



기차역을 향하던 발걸음보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조금 더 힘든 건 아직 아쉬움이 덜 털려서일까, 피로가 더 생겨서일까 생각하다 보니 아침나절 그 맛없는 밀가루 빵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게 생각났다.

시간은 벌써 3시를 향해 가는데 아마도 마지막 만찬이 될지도 모를 점심 겸 저녁을 무엇으로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고민할 기력도 없어 샨 누들 999로 정해버렸다. "아는 맛이 좋은 맛이다."


미얀마 영화관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걸 인지 한 뒤로 갑자기 급격히 허기가 지기 시작했지만 지나가는 길목에서 갈 때도 보았던 영화관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기차역으로 향할 땐 기차 때문에 무시하고 지나쳤지만 미얀마 영화관은 어떤 분위기일지 솔직히 많이 궁금했다. 껄로에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보았다고 줄줄 읊어대던 제리가 미얀마 영화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되살아 나기도 했고, 이 김에 미얀마 영화라도 한 편 어떨까?라고 잠시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들어가 봐도 딱히 흥미로워 보이는 영화는 보이지 않아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가 몹시 고팠다.


양곤 육교


마지막 만찬, 샨 누들 999


찜통 같은 날씨에 기껏 타러 간 기차는 놓쳤고 배는 고프고, 세상에 심지어 설마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물방울은 비? 아무래도 오늘의 내 운세는 꽈배기처럼 베베 꼬인 날인지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하늘에선 후드득하고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왔음에도 12일간 꺼낼일이 없더니 하필 빈손일 때 갑자기 이 무슨 낭패인지, 샨 누들 999를 향한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애매한 시간의 가게는 무척 한가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재빨리 처음 와서 먹었던 샨 누들과 튀김요리를 시키고 난 뒤 한숨 돌리려니 어디선가 반가운 한국말 소리가 들려왔다. 둘러보니 맞은편에 한국인 아주머니분들의 대화 소리였다. 마침 그분들께서도 날 발견하시곤 혹시 한국에서 왔냐며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고작 며칠 만에 한국말을 다시 하는 것인데 한국말 한마디 하는 게 이렇게 신날 수가 있는지, 한국에서 혼자 여행 왔다는 말에 한 아주머니께서 눈을 반짝이며 아가씨 혼자 대단하다며 추켜세워 주시자 옆에 계시던 다른 아주머니께서 요즘 사람들은 신식이라 혼자서도 멋지게 여행하고 다닌다를 시작으로 우리 땐 꿈도 못 꿨는 데로 흐름이 넘어가며 아주머니들만의 대화 속으로로 빠져버리셨다.


그 사이에 따끈따끈한 국수가 나오고 허기짐에 순식간에 국수를 먹어치웠다. 그 사이 맞은편 테이블 아주머니들께서도 자리를 뜨시고 2층을 차지한 손님은 나 혼자 뿐, 한가해진 틈을 타 점장님이 말을 걸어오셨다.


"혼자 여행 왔어요? 어디서 왔어요?"

"한국이요"

"오! 언제 왔어요?"

"내일 돌아가요"

"미얀마 여행은 즐거웠어요?"

"네,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미얀마 사람들 너무 좋아요. 또 올 거예요"

"꼭 다시 와요."

"네~ 샨 누들도 너무 맛있어요"

"오~ 굿!"


한가해진 식당에 혼자 남은 손님이 된다는 건 그 식당의 세심한 풀서비스를 받게 되는 특혜를 누릴 수가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컵에 차가 빌 때마다 언제 봤는지 찻잔을 채워주던 소년 점원은 내게 사소한 장난도 건넸다.

점장님 또한 필요한 게 없는지 계속 신경 써 주셨지만 이 풀 서비스를 오래 누리기엔 이미 국수가 게눈 감추듯 사라져 버린 탓에 빨리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대로 한가한 시간을 틈타 기념사진으로 달래보기로 했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라고 물어보자 짓궂던 소년은 어느새 반듯한 정자세로 자세를 잡았고 조금 어유가 있어 보이는 점장님이 환한 미소로 렌즈를 응시해 주셨다. 이렇게 그때 기억을 떠올리고 있자니 오늘은 왠지 샨 누들 999에서 점장님이 서빙해 주시는 4번 국수를 먹고 있는 꿈을 꿀 것만 같다.



어떻게 추억 속에 남을 것인가.


샨 누들까지 먹고도 하늘은 아직도 환했지만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순리를 따르기로 했다. 기차를 놓치고 한 번도 오지 않던 빗방울까지 떨어진 건 분명 이젠 좀 쉬라는 신호쯤 되지 않을까 싶었다. 숙소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1층으로 내려와 카메라의 사진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러다 그를 또 마주치게 되었다. 오전 나절 방을 배정받기 전 잠시 대기하기 위해 있을 때 내 맞은편에 앉아 나만 투명인간처럼 무시하던 외국인 남자가 있었다.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또 그 남자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물게 되었다.


그 남자는 역시나 이번에도 나를 뺀 그 주변에 있던 모두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지만 나 또한 그와 굳이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별생각 없이 넘어가려고 할 때 특이점을 발견했다. 그는 호스텔 직원 외의 아시아인에게는 먼저 선뜻 말을 걸지 않았다. 거기엔 나 이외에도 필리핀 출신의 영국인과 말레이시아와 홍콩 혼혈의 뉴욕 청년이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들이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하는 모습은 나뿐 아니라 거기 있던 모두가 듣고 있던 일이라 나처럼 영어를 못해서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는 무척 친화력이 좋아 보이는 사람으로 아침나절부터 내가 봤던 바로는 휴게실에 나와있는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일일이 돌아가며 먼저 말을 건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아시아인만 그의 대화 상대에서 빠져버린 것이었을까?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솔직히 유쾌하진 않았다.


나는 사실 살면서 인종차별이란 걸 남들을 통해 듣기만 해 봤지. 딱히 겪어본 기억은 없었다. 외국인과 그렇게 얽힐 일고 없고 딱히 얽히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혼자 여행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이들과 얽히게 되는 일이었고 꽤 많은 사람과 부딪치게 되는 일이었다. 그만큼 좋은 사람들을 훨씬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기도 했지만 유쾌하지 않은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도 있었다.


그저 낯선 나라의 사람들과 많이 부딪쳐 보지 못한 나의 좁은 경험치로 인한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을 보며 한 가지는 확실히 배울 수 있었다. 여행이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배려심이 필요한 일이란 걸,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고 어차피 한 번 보고 안 볼 사이들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다시 보지 않는 대신 인연들의 추억 속엔 함께 했던 그 순간의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추억 한 귀퉁이에 남게 될 것이다.

나는 내 미얀마 여행 중 만난 인연들의 기억 속에 어떻게 기억되고 있으려나?

누군가에 기억에 어떻게 남느냐 또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지만 그래도 나는 적어도 배려가 없던 사람으로 기억되진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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