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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아재 Oct 01. 2024

후회

여자는 우연히 한 남자와 동석했다. 그리고 남자가 말을 걸었지만...

소희는 모처럼의 점심 약속이 취소되었다. 


만나기로 했던 대학동기의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단다. 


큰 사고는 아닌 것 같아서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병원에 보호자가 필요해서 친구가 가야 한다고 급히 약속을 취소해 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친구와 취소된 약속장소가 회사 근처였다는 것이다. 


채 1시간도 남기지 않아 된 약속 취소 통보라서 소희는 딱히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다. 


회사 사람들에겐 약속이 있다고 양해를 구하고 사무실에서 일찍 나온 터였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친구와의 약속이라 랩어라운드 드레스 스타일로 차려 입고 나온터라 그냥 사무실로 복귀하긴 싫었다. 


목선과 가슴쪽에 많이 포인트를 준 드레스는 지나가는 남자들의 고개를 한번씩 돌아보게 만들었다.  


명동거리를 나와서 모처럼의 9월의 한낮을 즐겨보기로 했다. 


다행히 무더운 8월이 지나서 조금 싱그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아직 30도가 넘는 더위였다. 시원한 콩국수가 생각났다. 


사무실에서는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콩국수 맛집이어서 평소에는 잘 찾아가지 못했던 집이다.


얼음을 동동 띄운 콩국물에 거무튀튀하고 거친 메밀을 넣어서 만든 국수를 잘하는 가게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12시 35분이었다. 물론 자리는 만석이었지만 양해를 구하고 나온터라 오늘은 사무실에 1시 30분까지만 들어가면 된다. 


대기번호를 주는 데 두번째 번호였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아서 냉면이나 콩국수에 대한 수요는 높은 것이 당연했다. 


잠시 입구쪽의 나무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다. 


좀 지나서 종업원이 가게 입구 안쪽 문을 열고 고개만 내민 채로 큰 소리로 말했다. 


“손님, 여기 자리가 4인석 밖에 없어서 그런데 혹시 여기 1번분 2번분 합석 좀 가능하실까요?”


소희가 힐끗 보니 자주빛 티셔츠에 흰색 반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가 자신의 맞은 편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남자 옆에는 테니스 라켓 케이스가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점심시간에 반바지라니 직장이 없는 사람이군.'


“좋습니다.” 남자가 소희쪽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저도 좋아요.” 소희의 목소리는 맑았다. 


앞장서서 종업원을 따라가는 대기번호 1번 남자의 키는 제법 커 보였다. 


안쪽 창가 자리에 마주보고 앉았다. 소희는 가끔 생기는 이런 상황이 어색하고 싫었다. 


앞의 남자를 힐끗 보니 제법 긴머리를 퍼머를 했고 옆으로 칠대삼 가르마를 하고 있었다. 


“여기 콩국수가 서울에서 제일 맛있지 않아요?” 웃는데 남자의 치아가 제법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소희는 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현으로 짧게만 답했다. 답을 하면서도 머리속으로는 ‘흥, 주제에 키는 크네. 어이쿠 저 시계는 뭐야. 롤렉스인가, 아무튼 요즘엔 개나소나 짝퉁들고다닌다니까.’ 하고 생각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하시죠. 저는 ‘미스터 리’이라고 합니다.”


“영어학원 강사세요?” 소희의 말에는 상대에 대한 비웃음이 숨어 있었다.


“아, 그건 아니고 제 미국식이름입니다. 한국이름은....”


그때였다. 종업원이 큰 쟁반을 들고 와서는 둘이 사이를 가로 막았다. 덕분에 자기소개는 잠시 멈췄다. 


“여기 시원한 콩국수가 나왔습니다.” 종업원은 익숙한 자세로 쟁반위에 들고 온 콩국수 2개를 소희와 남자 앞에 하나씩 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요.” 


“네, 감사합니다.” 남자가 답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지 않나요? 얼음이 이렇게 동동 뜬 콩국수는 오랫만이네요. ”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핸드폰을 들어서 음식에 가까이 대고 사진을 찍었다. 


‘어머, 남자가 무슨 저런게 부산을 떨지. 아 난 저렇게 부산떠는 사람은 딱 질색인데. 생긴 것도 무슨 기생오라비처럼 깔끔하게 생겨가지고. 그나저나 어디서 본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하여튼 술을 끊어야 해. 설마 부킹했던 남자는 아니겠지?’ 온갖 상념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실례지만 성함이?”


“아, 저요? 저는 ....박소희에요. 박소희.” 여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이 아까부터 계속 자신을 자주 향하자 부담스러워졌다. 우리는 그냥 테이블 하나를 공유하기 위해서 앉은 사이일 뿐이다. 그 어떤 히스토리도 없고, 접점도 없었다.  


지난주에 소개팅한 남자도 그랬었다. 소녀시대의 써니와 정말 똑같이 생겼다고 말이다. 키도 몸무게도 정말 많이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애프터 신청을 받았지만, 그냥 은행원은 싫었다. 과장급이어서 억대 연봉을 받는다고 주선해 준 언니가 귀뜸을 해 주었지만 자신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그녀는 언젠가는 내 앞에 백마의 왕자가 와서 자기를 태우고 갈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믿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 같은 것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 키는 아담했지만 글래머스한 몸매에 지성미까지 갖추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다. 


소희는 핸드백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고 핸드폰 화면을 켜서 음악을 틀었다. 이어폰은 오른쪽을 터치하면 음악 소리가 올리고 왼쪽을 터치하면 음악소리가 작아졌다. 그리고 아주 좋은 노이즈 캔슬링 기능도 있었다. 아직은 음악소리를 작게 해 두었다. 


“소희씨, 이름이 아주 이쁘네요. 그 말씀 많이 들으셨을것 같아요. 가수 써니 닮았네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가수에요. “


그 때였다. 식당 카운터에서 있던 할머니 한분이 천천히 테이블쪽으로 다가왔다. 


“어이쿠 회장님 오셨어요.” 할머니가 아는 척을 했다. 


"저기 위에서 테니스 레슨 좀 받고 내려 왔어요. 모레 두바이에 가서 테니스 칠 일이 좀 있어서요." 남자가 말했지만 이 대화를 여자는 듣지 못했다. 여자는 서둘러 무선이어폰을 양쪽 귀에 끼웠기 때문이다. 


‘회장은 무슨, 하여튼 명동만 나오면 너도 나도 회장이란다. 니가 회장이면 나는 대통령이겠다. 흥.’


더는 대꾸하기도 싫어서 소희는 이어폰의 오른쪽을 두세번 더 터치했다. 이어폰에서는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디스코로 음악을 바꾸었다. 음악은 경쾌한 비트로 빠르게 귓가를 울렸다. 쿵쿵쿵쿵. 


콩국수는 아주 맛있었다. 

식당 여주인과 앞의 남자는 서로 잘 아는 듯 뭐라고 얘기를 하면서 말을 했다. 


디스코 음악을 들으면서 앞에 앉은 사람과 서 있는 식당 여주인의 대화를 보자니 그건 마치 판토마임처럼 보였다. 자신에게도 뭔가 남자가 말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음악에 심취하면서 식사에 열중했다. 남자도 얘기를 하다가 지쳤나보다. 나중에는 콩국수를 다 먹은 남자가 자신의 앞에 서서 양팔을 벌리고 나갔으니 말이다. 


들어봐야 다 의미 없는 구애의 행동이 뻔했다. 연애인을 닮았느니, 눈이 호수같다느니 하는 것은 다 남자들의 뻔한 수법일 뿐이니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등을 팍하고 쳤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아까의 그 식당 여주인이었다. 


“아얏, 왜 그러세욧.” 소희의 말이 가시 돋친 듯이 날카롭게 공간을 울렸다. 


“어머, 미안해요. 아가씨, 아니 그래도 저 분이 음식도 계산하고 갔는데 고맙다는 인사라도 좀 하지 그랬어요.”


“아, 죄송해요. 음악소리가 커서 못 들었어요. 식사 계산도 저 분이 하셨군요.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콩국수 값을 이미 앞에 앉은 남자가 계산했다고 하니 소희는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에는 인사를 한 것이었구나. 괜한 오해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그랬구나. 그럼 저분이 데이트 신청하는 것도 못 들어서 그냥 거절하신 거에요?” 식당 여주인이 한번 더 말했다. 


“네? 아 죄송해요. 그랬군요.” 그래, 소희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이 명함이 있으면 하나 달라고 하셨잖아요. 그걸 다 무시하셨으니..그냥 웃으면서 정중한 거절로 아시고 나간 거에요. 제가 아가씨라면 절대 저런 분에게 그렇게 거절하진 않았을거에요.” 식당 여주인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엔 소희에 대한 존경이 묻어 있었다. 


“...........” 

소희는 그때까지도 식당 여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해서 가만히 있었다. 


“아무튼 우리 여자 손님도 고결하시고 대단한 분이시네요. 저런 재벌을 거절하시다니요. 저 분이 물론 흠이 있는 건 맞죠. 재작년인가 일본 출장가서 이혼통보를 받았으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저 분의 개인 재산이 10조가 넘는답니다.” 식당 여주인은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소희는 그제서야 자신의 앞에서 앉아서 식사를 한 그 남자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시간이 훌쩍 흘러 1년후. 


그로부터 1년 후 소희는 그 남자의 결혼소식을 신문기사를 통해서 보게 되었다. 그의 결혼상대는 아이돌 스타인 소녀시대의 써니였다. 바로 친구들이 소희에게 늘 닮았다고 하던 그 써니였다.


아침 커피에서 쓴 맛이 났다.


' 아니 그건 그렇고 요즘 이어폰의 노이즈캔슬링 기능은 왜 이렇게 강력한거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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