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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Oct 09. 2024

14. 뮤어 우즈

3부 상실된 언어를 찾아서


샌프란시스코의 아침 공기는 더 없이 신비로웠다. 물안개를 담은 듯 반투명한 공기가 자욱이 깔렸고 그 사이로 구겨진 전단지가 낙엽처럼 날렸다. 흐린 날씨에 약간 서늘한 기운이 도는 전형적인 샌프란시스코 날씨였다. 그가 이른 아침 혼자서 호텔 밖으로 나온 건 혼자서 이 여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스타벅스에서 아내가 좋아하는 바닐라 소이 라테를 사기 위해서였다. 아내는 카페인에 민감했다. 기분이 나쁜 것 같다가도 커피 한 모금만 들어가면 카페인이 혈액순환을 촉진하며 굳어진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유니언 스퀘어와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에 간 후 뮤어 우즈까지 가야 하는 오늘 일정을 생각하면 증기기관사가 엔진실에 장작더미를 쌓아 놓듯 연료를 구비해 둬야 했다. 아침 일찍부터 카페인으로 충전해 주고 온종일 수혈이 필요할 터였다.


어젯밤, 아내에게 오늘 뮤어 우즈에 갈 거라고 얘기했을 때 아내는 연서와 피어39에서 산 스노우볼을 만지작거리다 움찔하며 눈을 도사렸다. 그 역시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뮤어 우즈라면 이번 여행의 클라이맥스 아니던가! 사실 그는 어젯밤부터 몇 번이고 아내와 손을 잡고 뮤어 우즈를 산책하는 상상을 되풀이했다. 머릿속에서 길을 걷고 다시 또 한번 걸을 때마다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오른 카파도키아 열기구처럼 솟아올랐다. 물론 하늘 높이 떠오른 게 나는 아니었다. 이미 이별을 결심한 나는 땅속 깊숙이 말뚝을 박고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아내가 추억의 장소를 방문하며 감동하는 게 아니라 산행에 지쳐 서릿바람을 휘몰아쳐도 꿈쩍하지 않도록 말이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아내 역시 기대하고 있는 것 같긴 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클럽 샌드위치와 연어 샌드위치는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밀폐 통에 넣었고 스낵 사이즈 봉지에 담긴 프레첼과 감자칩도 챙겼다. 한국식으로 돗자리 깔고 피크닉할 건 아니지만 가볍게 하이킹하다 녹음이 우거진 벤치를 골라 앉아 신선한 공기를 즐기며 샌드위치를 먹는 거야 말로 행복한 가정의 상징 같은 것 아니겠는가! 이 상태로 예전의 그 나무둥치를 찾아간다면 오늘이야 말로 완벽한 하루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그 하루를 즐기는 건 그와 아내겠지만, 나로선 그 정도로도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었다.




호텔을 나선 그는 유니언 스퀘어로 차를 몰았다. 평일 오전이면 딱히 차가 막힐 시간은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움직임이 더뎠다. 유니언 스퀘어 인근에 다가가자 시끌벅적한 게 무언가 이벤트가 있는 것 같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람들이 붐볐고 주위를 둘러싸고 경찰차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와, 아빠 저게 뭐야?”


연서는 유니언 스퀘어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며 말했다.


“글쎄. 행사 같은 게 있나 본데. 가 볼까?”


“사람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아내는 두 눈에 불안을 가득 담고 옹송그린 손을 만지작거리며 걸음을 멈춰 섰다.


“유니언 스퀘어야 원래 사람 많으니까. 행사까지 해서 더 그런가 보지.”


“행사가 아니라 시위 같은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언뜻 보니 군데군데 경찰차도 즐비하게 서 있고 피켓도 보이는 게 아내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네, 그럼 가지 말까?”


“위험해 보여.”


“위험하진 않을 거야. 유니언 스퀘어 한복판에서 무슨 일이 있겠어. 가지 마?”


“....”


“이런 거 보는 것도 공부지. 여기까지 와서 유니언 스퀘어도 안 보고 그냥 갈 순 없잖아.”


아내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아내로선 이미 본인 의사 표현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 의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묻고 또 물었다. 이미 눈과 귀와 발은 유니언 스퀘어를 향하고 있으면서 아내에게 긍정을 강요하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는 것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항상 저런 식인가?


“엄마, 가 보자. 뭐 하는 건지 보고 싶어.”


“...”


연서까지 칭얼대자 아내로서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는 확실히 무심했다. 저 많은 인파 속에 아내가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공황장애 환자가 시위대 속에 들어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시위라는 살아 있는 수업을 참관할 좋은 기회를 연서에게 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이 정도 소음과 인파에 익숙해지는 게 아내 증상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억측으로 돌변해 자신도 모르게 연서 손을 잡고 성큼성큼 유니언 스퀘어를 향해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길을 건너자 유니언 스퀘어로 올라가는 계단부터 녹색 물결이 가득했다. 녹색 스카프를 두른 여인들과 녹색 배너와 깃발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장송곡 분위기로 잔잔히 깔린 음악 소리를 뚫고 시위대의 외침이 울렸다.


“연방 대법원이 어떻게 미국인의 헌법적 권리를 박탈할 수 있나? 여성의 선택권을 보장하라!”


“주여, 여성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 주소서!”


“마들렌을 지킵시다! 제2의 마들렌이 있어선 안 됩니다!”


마들렌? 얼마전 읽었던 뉴스가 생각났다. 마들렌은 미시시피 출신의 13세 여자 아이였다. 신원미상의 남성에게 강간을 당해 임신했고, 미시시피에서 임신중절 수술이 불가해 불법으로 시술을 받다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연서는 확성기에 입을 대고 한입으로 ‘마들렌’을 외치는 군중의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두 손으로 내 왼손을 꼭 붙들고는 시각장애인이 보호자에 기대 길을 걷듯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시위대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한 듯 발길을 멈추진 않았다. 그는 보여 주려면 제대로 보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연서 겨드랑이 밑으로 두 손을 쓱 집어 넣고는 그대로 연서를 어깨 위로 올렸다.


“이제 잘 보여?”


“어.”


“무섭진 않지?”


“조금 무섭긴 해.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아.”


시위는 낙태를 찬성하는 진영에서 기획한 듯 대다수 사람이 찬성을 외치고 있었다. 미국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기반으로 대법원에서 낙태를 합법화했지만 얼마 전 연방법원이 그 결정을 뒤집었다. 이에 잦은 시위가 벌어졌는데 오늘은 투쟁하겠다기보다 서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추모제를 여는 분위기였다. 추모 대상은 불법 시술로 목숨을 잃은 마들렌이고 말이다.


그때 시위대 일원으로 보이는 여인이 중앙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섰다. 짧은 금빛 단발에 청바지와 녹색 티셔츠 그리고 목에 녹색 스카프를 두른 단아한 모습의 중년 여성이었다. 여성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마들렌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 중 누군가의 딸일 수 있고 친구일 수 있는 아이라고 말이다. 시위대는 외치던 구호를 멈추고 그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빠, 마들렌이 누구야?”


“어, 저기 사진 보이지? 저 사진에 있는 애야.”


“마들렌이 죽은 거야? 왜 죽었는데?”


이걸 연서에게 어떻게 설명하나 하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낙태 수술이란 것도 설명하기 어려웠고 애초에 임신하게 된 ‘강간’도 연서 사전에는 없는 단어였다. 이런 설명이라면 자신보다는 아내가 나을 것 같아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아내가 매섭게 그를 지르보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뭐가 도화선이 된 건지 아내 눈동자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눈썹의 미세한 일그러짐이나 다소 거칠어진 숨소리 그리고 상기된 얼굴에서 성마른 폭발의 전조가 느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화염 같은 화를 토해냈다.


“제발 좀 가자 그랬잖아!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소음이 신경을 건드린 걸까? 아니면 낙태나 강간을 설명하게 된 이 상황이 화가 났던 걸까? 도대체 뭐가 얼마나 잘못됐다고 이리 화를 내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피가 머리끝까지 역류하며 소용돌이처럼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죄었다. 울화가 치밀어 나 역시 폭발할 것만 같았다.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빈틈을 찾아 치고 들어온다. 여기서 조금만 정신 줄을 놓으면 난 저 소용돌이에 휩싸여 다시 또 이성을 잃게 된다. 나마저 화를 내면 그대로 끝나는 거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고작 스테이크 하우스에 한번 갔다고 아내가 예전처럼 되돌아갈 리 없는데 괜한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 보였는데 언제 이렇게 돌변한 걸까? 의문을 집어삼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쩜 그렇게 이해심이 없니? 맙소사, 마들렌이라니. 마들렌.”


“….”


마들렌이 어떻다고. 도대체 뭐가 문제라고 이러는 걸까?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냐고!”


아내는 순간 버럭 고함을 지르더니 홍수가 난 듯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곤 심장 쇼크라도 온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 아내에게 다가설까 하다 멈칫했다. 다가서서 괜찮냐고 물어라도 보는 게 맞는 건가, 아니면 이대로 화를 좀 삭이게 놔두는 게 맞는 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는 그대로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먹였고 연서는 겁을 먹었는지 그의 팔목을 붙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불끈 쥔 두 주먹은 부르르 떨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예고 없이 급발진하는 그녀의 이런 행동이나 반응들은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그는 나름 공황장애라는 증상을 대입해 상황을 합리화 해 봤다. 갑작스러운 소음과 이 어지러운 환경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공포를 만들어 냈고 아내는 그 공포에 휘둘린 것이다. 시위대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돌격한다든가, 뭐 그런 종류의 망상 아니겠는가? 아내의 나약한 정신에 악귀가 깃든 걸까, 아니면 악귀가 깃들어 아내가 나약해진 걸까?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자니 그도 화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 관찰만 하는 게 도움이 되긴 하나 보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던 행동에 이유와 동기가 주어졌고, 그러면서 부글거리던 그의 마음도 차차 가라 앉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시위대 한 명이 괜찮냐는 듯 눈짓을 줬고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손바닥을 내밀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참 동안 아내를 지켜보다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괜찮어?”


아내는 그제야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손으로 얼굴을 한번 훔친 그녀는 크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숨이 조금 가라앉는가 싶더니 아내는 돌연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난 혼자 좀 있을게. 당신은 연서하고 가고 싶은 데 가.”


아내는 그대로 등을 돌려 길가를 향해 계단을 내려갔다.


“어디가?”


“난 호텔로 갈 테니까 당신은 어딜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같이 가. 데려다줄게.”


“됐어. 지금은 도저히 당신하고 같이 못 있겠어.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택시 타고 갈 테니까.”


“엄마!”


“연서야, 그냥 아빠 따라가. 엄마는 좀 쉬어야겠어.”


“싫어. 난 엄마 따라갈래.”


“그만 좀 해. 아빠 따라가라고 이 바보야. 엄마도 좀 쉬어야 할 거 아니야. 네가 그렇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으면 엄마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다고!”


연서는 갑작스러운 아내의 역정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연서에게까지 저리 상처를 줄 수 있을까? 아내는 도망치듯 창황히 계단을 내려갔다. 연서는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아내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그들이 계단을 채 내려가지도 못했을 때 아내는 길가에 서 있던 택시를 잡아타고 그대로 시선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떠나자 일순 모든 게 소적해졌다. 미국 결혼식 날이나 그들이 가족으로 탄생한 첫해를 축하했던 추억 모두 하얀 재가 되어 흩날렸다. 문득 머릿속엔 ‘하긴 내가 뭘 기대한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그는 그 생각이 그가 정말 기대했던 게 없어서 떠오른 생각인지 아니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 스스로를 위로하려 떠올린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뮤어 우즈는 결국 그 혼자만의 몽상으로 남게 되나 보다.




연서는 차 뒷좌석에서 골아떨어졌다. 아직 시차 적응도 못 했을 테니 졸릴 만도 했다. 그 역시 노곤하긴 마찬가지였다. 감기 기운도 여전했고 유니언 스퀘어에서 한바탕 에피소드가 있고 난 뒤 긴장이 풀려서였다. 금문교를 지난 후 뮤어 우즈를 향해 뱀처럼 휘어진 길을 몇십 분째 운전하자니 어지럼증까지 올라왔다.


빵. 빵.


귓등을 때린 경적에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반사적으로 핸들을 틀어 넘어갔던 중앙선을 다시 넘어왔다. 눈이 감기려나 싶었던 건 기억했지만 졸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니 연서는 여전히 꿈나라였다.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차를 갓길로 바짝 붙여 댔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송이 떨어지듯 감기는 눈꺼풀이 내려앉도록 내버려 두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르르 떠진 눈을 비비며 시계를 봤다. 꽤나 졸았던 것 같은데 시간은 10분 남짓 지났을 뿐이었다. 연서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 비에 젖은 강아지가 물을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며 뮤어 우즈 방문객 센터를 향해 차를 몰았다. 도로에서 차를 꽤 본 것 같은데 그날따라 이상하리만치 한가했다. 입구부터 물안개가 자욱했고 주차장은 안개 속에 마을 주민이 모두 사라진 어느 동화 속 설정처럼 텅 비어 있었다. 연서를 깨우려는데 연서는 귀찮은지 ‘나 그냥 잘래. 아빠 혼자 갔다 와’라며 그를 밀어냈다. 연서에게 세쿼이아 숲을 보여 주고 싶긴 했지만 억지로 잠을 깨울 것까진 아니었다. 연서에게 1시간 안에 돌아올 테니 차 근처에 있으라고 말하자, 연서는 잠투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차에서 내려 숨을 한번 들이마시자 축축한 냉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그는 닭살이 오돌토돌 돋은 팔을 비비며 파운더스 그로브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트레일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자 안개는 더욱 심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세쿼이아 나무들에게 만찬이라도 준비한 듯 안개는 나무줄기를 따라 묵직이 창공을 채웠다. 사람 한 명 보이질 않는 탓에 이러다 정말 길이라도 잃어버릴 것 같아 겁이 덜컥 났지만 10년 전 거닐었던 그 길은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금껏 단 두 번 거닐었던 길인데 뇌 속에 뉴런들이 일정한 패턴을 새겨 놓은 듯 반사적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는 구슬발을 제치며 복도를 걷듯 안개 장막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이어지는 오르막길에 가쁜 숨이 내쉬어졌고 산세도 험했지만 그는 침착히 미로 같은 길을 찾아갔다.


숲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나무둥치가 보였다. 안개는 어떤 경계를 만들 듯 나무둥치를 에워쌌고 한 줄기 빛이 높다란 세쿼이아 가지들을 뚫고 무대 위 조명처럼 나무둥치를 비췄다. 10년이 지났어도 묵직하게 땅을 뚫고 뿌리를 박은 나무둥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간 방문객 한 명 없었던 듯 둥치를 에워싼 설치류나 이끼류도 여전했다. 


그는 나무둥치에 걸터앉으며 나이테 위로 손을 올렸다. 나이테의 굴곡을 따라 어떤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땅속 깊숙이 박은 뿌리가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펌프처럼 흙의 정기를 빨아들여 하얗게 드러난 속살 사이로 내뿜었다. 그의 신경은 이상하리만치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나무둥치에 대고 있던 오른손 중지 끝마디에선 둥치 단면의 굴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이테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은 컴퍼스의 한쪽 끝이 되어 원을 그렸다. 그러곤 레코드판 위에 올려진 바늘처럼 나이테의 굴곡을 따라 빙글빙글 돌아갔다.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가 돌아갔고 어지럼증이 일었다. 


순간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시야에 잡힌 나이테의 문양이 중첩되며 오래된 환등기로 35mm 필름을 한 장씩 투사하듯 아내와 이곳을 방문했던 순간들이 어룽어룽 떠올랐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기대감으로 설레며 이곳을 향했던 발걸음이나 육아로 지쳤던 일상을 벗어나 하늘을 보고 마음껏 신선한 공기를 마셨던 그날이 상기됐다. 그땐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땐 얼마나 세상이 장밋빛 미래로 가득할 거라 생각했는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모든 게 변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은 실망과 함께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차츰 무너져 갔다. 아내의 얼굴은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졌고 그는 차마 그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으로 서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갔고 태풍이 몰아치는 듯 위액이 울렁였다. 연서의 울음소리에 괴로워하던 모습, 바이올린을 가르치다 심화병이 도진 듯 화를 견디지 못하던 모습, 설거지하다 이유 없이 장탄식을 뿜어내던 모습, 그리고 시위대 소음을 견디지 못해 눈물을 흩뿌리며 호텔로 내달리던 아내 모습이 연달아 보였다. 그 길고 긴 시간과 변화의 흐름이 음유시인의 서사시가 되어 나이테를 따라 실오라기처럼 풀어졌다.


내가 지금 이 나이테를 읽고 있는 건가? 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문자를 읽는다는 건 하나의 규칙을 배우고 그 규칙에 따라 의사소통하는 법을 훈련받는 것이다. 문자 자체란 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지극히 무작위화한 문양일 뿐이다. 따라서 나이테의 문양이 문자로 사용되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무작위의 문양이 문자로 사용되려면 거기엔 문양의 반복적인 패턴과 규칙적인 쓰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분명 이 나이테는 처음 보는 것인데 그는 마치 아주 오랜 시간 훈련을 받아 온 것처럼 스스럼없이 나무둥치 위에 적힌 문양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나이테에는 아무 의미도 담겨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어떤 일시적인 착각으로 인해 그렇게 생각했거나, 아니면 수천 년 세월을 자라온 이 거대한 세쿼이아 숲을 보며 생긴 어떤 감정적 절정에 의해, 혹은 심미적 황홀감에 의해 섬망에 휩싸인 듯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아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당황스러워하는 상태 아니던가? 하지만 그가 지금 겪고 있는 경험은 여전히 그에게 큰 경외감을 줬고 그는 어떤 위대한 개안이나 신성한 계시를 경험한 듯 나무둥치를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시곗바늘처럼 돌아가던 그의 손가락이 정확히 10년 전 오늘, 아내와 내가 이곳에 왔던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여기네.”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려온 아내의 목소리에 등줄기를 타고 찌릿한 전율이 흐르며 머리칼을 바짝 일으켜 세웠다. 아내가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그가 고개를 돌리려는데 머리가 핑 돌며 시선이 흐릿해졌고 순간 뭉뭉한 어둠이 시선을 감싸며 세상이 암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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