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Jan 31. 2024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12화  첫 문장과 끝 문장 쓰기

다음은 처음 글쓰기 수업에 참여해서 들었던 첫 문장과 끝 문장 쓰기와 관련된 내용이다. 첫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학생들과의 수업에서는 늘 그렇지만 예문을 가지고 말하고 쓰게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다음의 문장을 읽고, 글에 있는 여러 소재 중에서 주제로 내세울 수 있을 만한 것을 추출하게 한다. 여러 주제가 나오면 각각이 선택한 주제에 따라 첫 문장으로 내세울 수 있는 문장에서 고르게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주제에 따라 첫 문장의 선택이 적절했는지 각각 얘기하게 한다. 


이러한 활동이 끝난 후, 첫 문장의 중요성과 의미를 말하는 것이 좋다. 이른바 주제에 따른 첫 문장 선택에 대한 수업이다. 




초봄 햇살이 눈부신 오후였다. 아버지는 5남매를 모으셨다. 사진 찍기 좋은 날이란다. 동네 아저씨의 큼직한 카메라는 'CANON'이라는 상표가 큼직하게 박힌 가죽 케이스에 긴 줄이 매달려 있었다. 노총각이었던 그 아저씨를 우리는 그냥 아재라고 불렀다. 경상도에서 숙부 당숙부를 가릴 것 없이 친근함의 표시로 남자 어른을 그렇게 불렀다.
아버지는 아주 가끔 그 아저씨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전속 사진사 마냥, 네 살 아래 남동생이 태어나 돌이 되기 전에 아저씨는 사진기를 사셨던 것 같다. 남동생을 가운데 두고 큰언니 작은언니 나 이렇게 세 명이 서로 안으려고 하는 장면이 찍힌 사진이 가장 오래된 걸 보면 우리 오 남매는 자연스레 그 아저씨의 사진기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집 앞 도로에 의자를 두 개 내놓으시고 야외 사진관을 꾸몄다. 아버지의 요구 사항은 많았다. 먼저 제일 깨끗한 옷을 입고 나와라,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라 등등. 나는 살짝 짜증이 났다. 큰언니가 입다 물려준 바지는 무릎이 나왔고 스웨터는 소매가 닳고 짧은 옷뿐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코디는 없었다. 남동생들은 외출을 할 때나 입던 점퍼까지 엄마가 입혀 주셨다.(이하생략)

주어진 예문을 다양한 주제가 보인다. 주제를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학생들이 편하게 말하게 해도 좋다. 학생들이 선택한 주제가 나오면, 그것을 바탕으로 첫 문장으로 어떤 것이 오면 좋을지 선택하게 한다. 


각각의 주제에 따른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나올 수 있다.


1. 사진 찍는 날
- 초봄 햇살이 눈부신 오후였다.
2. 아재
- 아버지는 아주 가끔 그 아저씨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3. 캐논 카메라
- 동네 아저씨의 카메라는 'CANON'이라는 상표가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 네 살 아래 남동생이 태어나 돌이 되기 전에 아저씨는 사진기를 사셨다. 
4. 아버지
- 그날도 아버지는 집 앞 도로에 의자를 두 개 내놓으셨다.


주제가 달라지면 첫 문장이 달라진다. 주제가 달라지면 글의 제목도 달라진다. 주제의 선택, 첫 문장의 선택, 제목의 선택에 따라 이후에 따라오는 문장의 배열은 달라진다. 즉 주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같은 글이라도 전혀 새로운 글이 될 수 있다. 


학생들에게는 주제를 선택하게 하고, 첫 문장을 선택하게 하고, 제목을 짓게 한다. 이후에 선택한 주제에 따라 문장 전체를 재배열하도록 수업을 진행할 수도 있다. 이때 문장의 변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첫 문장은 글의 방향을 제시하거나 암시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글의 첫 문장은 매우 중요하다. 글 전체에서 첫 문장이 차지하는 무게가 70%라고 말하는 작가도 있다. '소설 한 편은 첫 문장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첫 문장은 독자의 입장에서도 중요하다. 흥미롭거나 관심이 가는 내용일 것 같은 예감이 들거나 호기심이 발동해야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첫 문장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우선 아무렇지도 않게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초고를 쓴 후에 첫 문장을 고민하면 된다. 첫 문장이 바뀌며 생각이 다시 정리되고 글 전체가 바뀌게 된다.


첫 문장은 노력으로 익힐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쓴 첫 문장을 유심히 보거나 신문 논설이나 칼럼의 첫 문장을 찾아서 기록해 보기, 소설의 첫 문장을 필사하거나 암기하기 등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실력이 는다. 


다음은 첫 문장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다. 물론 각자의 선택에 따라 동의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문장은 주인공이 누구인지,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암시를 담는다.
첫 문장이 글의 흐름을 장악한다.
첫 문장은 짧을수록 좋다.
첫 문장에 부사를 쓰지 마라. 길어지고 늘어지기 쉽다.
첫 문장에 전개될 실마리나 궁금증이 담겨 있는 게 좋다.
첫 문장이 작품의 어조를 결정한다.
첫 문장은 뒤따라오는 문장을 좌우한다.
첫 문장은 직접적이지 않고 약간 중의적인 것이 좋다.
첫 문장으로 사실을 그대로 옮기는 것도 좋다.
초고를 쓴 후 첫 문장으로 사용하면 좋을 문장을 찾아 옮겨오기도 한다.
첫 문장의 가치는 글 전체의 가치다.


여러 작품에 나타나는 첫 문장을 참고하면 위의 내용들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늦은 저녁에야 K는 도착했다. 마을은 깊이 눈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프란츠 카프카, <성> 제1장)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페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 <날개>)

그래, 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릴케, <말테의 수기>)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아 있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그에게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모든 인간은 별이다. 이젠 모두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지만, 그래서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여전히 진실이다.(임철우, <그 섬에 가고 싶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 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김훈, <칼의 노래>)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2004년 9월 12일 새벽은 내가 아버지 편에 서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었다. (정유정, <7년의 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적이 없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역시 작가들의 첫 문장은 평범하지만 범상치 않다. 학생들에게 이러한 작품들의 면면을 보여주면 자신의 글을 돌아보며 뭔가 더 충격적이고 강한 문장, 화려한 문장을 써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번 강조하듯이 가장 좋은 글은 평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이다. 단어의 선택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늘 쓰는 말로 우리의 삶을 담으면서 진실함이 묻어나면 좋은 문장이 될 수 있다.


수업의 종반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첫 문장 쓰기 수업은 퇴고에 적절할 수도 있지만, 이미 시작된 글쓰기에 혼란을 줄 수도 있다. 시간이 넉넉한 글쓰기라면 충분한 시간 공을 들여 첫 문장을 고르고 이후의 글의 흐름을 다듬는 데 좋은 방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는 책 쓰기 수업의 측면에서 꼭 알려주고 싶은 수업이라서 짧게 진행했다. 


에세이의 첫 문장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멋진 첫문장보다 일단 첫문장이 필요하다. 

끝문장은 솔직하게 느낀 감정에 대해 쓰는 것으로 충분하다. 진심이 아니라면 마지막 부분에 교훈을 쓸 필요는 없다. 교훈은 글쓴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찾는 것이다. 다만, 너무 비장해지지 않는 것이 좋다. 





이전 12화 나만의 시각으로 대상을 포착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