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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세연 Dec 07. 2024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게 된 순간

2003년 3월 말,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프렌치토스트와 베이컨, 그리고 따뜻한 우유를 준비해 주었다. 아침마다 차려지던 식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전날과 다르지 않게 등교도 했다. 수업시간에 졸기도 했고,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웃었다. 점심시간에는 급식을 먹고 운동장도 산책했다. 역시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하교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데리러 왔어. 엄마 정문에 있어.”


학교 정문으로 가서, 엄마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차가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어? 어디 가는 거야?”

엄마가 답했다. “우리 집 이사 갔어.”


그 말은 낯설고도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아침까지도 아무렇지 않던 우리 집이, 반나절 사이에 이사를 갈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우리 집이 망했다는 것을.


엄청난 계획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집도, 공장도, 우리 가족이 쌓아왔던 모든 자산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사 간 집은 정말 엉망이었다. 침대 대신 매트리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화장실에는 세면대조차 없었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았다. 집은 3월의 추위를 견딜 수 없었는지, 집 안에서도 입김이 났다.


우리 집은 그렇게 단숨에 가난해졌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난 가난을 받아들이기에 어렸던 모양이었다. 가난을 들키지 않으려고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기에 엄마는 큰 냄비에 물을 팔팔 끓여주었다. 뜨거운 물과 찬물을 섞어가며 씻었다. 차가운 공기가 매섭게 감싸는 화장실, 세탁기 위에 올려놓은 난로의 미약한 온기로 겨우 버텼다. 엄마는 매일 교복 셔츠를 세탁해 주름 하나 없이 다려주었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렇게 매일을 보냈다.


그렇게 잔인한 봄을 겨우 버텨냈고, 여름과 가을 역시 버텨냈다. 그렇게 낯선 환경에서 맞이한 첫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신발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로 운동화를 살 돈이 없어 낡은 컨버스 하나만을 주야장천 신고 다녔다. 찬바람은 신발 틈으로 스며들었고, 굽이 닳아 맨바닥을 걷는 기분이었다. 내 몸과 교복을 아무리 단정하고 깔끔하게 한다고 해도, 낡은 신발은 숨길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건 옆 학교를 다니던 남자친구였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어느 날, 그는 빨간 나이키 상자를 내밀었다. 박스 안에는 새 운동화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신발이 아니었다. 나를 걱정한 남자친구의 마음이었다. 집이 무너지고, 마음이 무너졌던 시간 속에서 그 신발은 나에게 다시 걸어갈 힘을 주었다.


나는 그날, 어렸지만 사랑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나의 아침 식사를 만들었고, 교복을 다렸고, 팔팔 끓는 뜨거운 물을 준비해 주었다. 내가 추울까 봐,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매일 아침 나를 지켜주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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