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아이들의 이야기
긴 방학의 한가운데, 토요일 오후의 햇살은 유난히도 무심하고 한결같다. 아동센터 아이들과 보내는 하루는 늘 그렇듯 단정하고 평범한 듯하지만, 그 안에는 작은 기쁨과 소란, 그리고 삶을 깊이 있게 데우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은 각자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간다. 어떤 아이는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책을 펼쳐 들고, 어떤 아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공터에서 축구공을 찬다.
제각각의 시간 속에서 제 마음껏 숨을 쉬는 것이다. 그렇게 저물 무렵, 오후 5시 반이 되면 하나둘씩 차에 오르고, 우리는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는 오후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날은 마침 영오장날이었다.
장터가 막을 내리는 시각,
아이들을 태운 차는 장터 입구에 살짝 멈추었다.
내 호주머니를 뒤지고, 차 안 여기저기 흩어진 동전들을 긁어모으니 삼천 원 남짓.
그걸 들고 만두차 아주머니에게 갔다.
한 통에 이천 원 하는 찐빵을 세 통이나 내어주시는 그 아주머니는 매번 그러셨다.
“목사님이 아이들이랑 늘 같이 다니는 게 보기 좋아서요.”
하시며 미소를 지어주시는 분.
사람의 정이라는 게, 이래서 장터에 있나 보다.
차 안에 탄 아이들은 순식간에 만두를 해치운다. 그 순간만큼은 목사님, 체면이고 뭐고 없다. 아이들 손에서 슬쩍 만두를 뺏으며 "먼저 먹는 사람이 주인이다!"라고 외치는 건 나다. 아이들은 자지러지게 웃으며 덥석덥석 입에 욱여넣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습고 사랑스러운지, 저녁 무렵의 햇살마저 아이들 뺨 위에서 부드럽게 퍼지는 것 같았다.
차는 다시 출발한다. 오늘은 먼저 혜민이와 용복이를 신흥마을에 데려다준다. 영오초등학교 담을 끼고 좌회전을 해서 논길을 따라가다 보면 갈대가 우거진 영천강 다리를 건너게 된다.
다리를 지나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 나오는 그곳, 신흥마을. 같은 시골이어도 이상하게 이 마을에만 발을 들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고, 논 사이를 가르는 바람이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논길 어귀에서 차를 멈췄다.
나는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얘들아, 목사님이 시속 10킬로로 달릴 테니까, 한번 뛰어보자. 못 이길걸?"
아이들과의 ‘차 대 인간’ 달리기 시합은 이미 몇 번째인지 모른다. 늘 질 줄 알면서도, 이 아이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목사님, 정말 10킬로 맞아요? 사실은 60킬로 아니에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속도계를 주시하는 아이들. 의심 반, 설렘 반의 눈빛은 도무지 숨기질 못한다.
경주가 시작되자 아이들은 ‘헥헥’ 숨을 몰아쉬며 뛰고 또 뛴다. 도착지점인 전봇대 앞에 도착하여 기다려주면, 아이들은 다시 전속력으로 따라온다.
마치 이 세상에서 유일한 재미가 이 순간뿐인 양, 아이들은 온몸으로 뛰었고 달리기에서 지고도 웃는다.
차 안에 남아있던 아이들은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다. “너희들 차례도 곧 온다…” 속으로 피식 웃으며 나는 운전대를 돌렸다. 혜민이와 용복이를 다 내려주고 나면, 나머지 아이들도 같은 방식으로 내려주게 된다.
한 명 한 명, 동네마다 다르게 피어 있는 들꽃처럼.
모든 아이들을 집에 바래다준 후, 차 안엔 7살 준서만이 남았다. 돌아오는 길에 명훈이와 혜란이네 집에 들러, 할머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다시 달리며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하나님, 명훈이와 혜란이가 이번에 장학생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 아이들이 돈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게 해 주세요…”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 바람은 선선하고, 차창 너머로 보이는 산 그림자는 길게 늘어진다.
이 길 끝에 있는 선한이웃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의 꿈이 자라는 집.
오늘 하루도 그 아이들의 작은 세상을 품에 안고,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이 평범한 토요일 오후가 내게는 하루 중 가장 흐뭇한 시간이다. 누군가는 이걸 ‘사소한 하루’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내겐 이 작은 일들이 모여 인생을 더욱 깊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아이들의 웃음과 땀, 달리고 또 달리던 그 논길 위의 발자국 하나하나가 내게는 생의 의미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오늘도 나는 안다.
삶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아이들과 함께 웃는 그 자리에,
누군가의 만두를 나누는 손끝에,
그리고 붉게 타는 저녁노을 아래,
삶의 의미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