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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Nov 07. 2019

#23. 우리의 드라마

장르: 공포 다음 멜로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얇은 책 두 권이 집으로 배달됐는데 내 결과지 표지에만 큼지막한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재검사가 필요합니다. 세부 내용을 확인해주십시오. 

 예상에도, 계획에도 없던 전쟁이 시작됐다.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다 보니 결혼식이 2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동이의 예복을 찾기로 한 날이었다. 백화점으로 가기 전 병원에 먼저 들러 검사 결과를 보기로 했다. 별일 아닐 거라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자꾸만 기운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토요일 아침인데도 대기실은 북적였다. 예약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다. 주말엔 시계도 쉬고 싶은 건지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30분을 기다린 끝에 진료실로 들어갔다.

 "이 사진을 보면요. 가슴 안쪽에 하얀 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은 게 보이죠? 이게 미세 석회라는 건데 일 수 있거든요. 환자분 같은 경우에 확률은 80% 정도 되고요."

 그때 우리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잡고 있던 손에 잠시 힘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계속됐다.

 "암인지 아닌지는 큰 병원에 가서 조직 검사를 해서 알아보는 방법이 있고요. 그게 부담스러우시면 3개월 정도 두고 보다가 미세 석회가 더 많이 생기면 사실상 암이라고 봐야 합니다."

 갑자기 가슴이 막 아팠다. 슬프다는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통증이 느껴졌다.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평소 즐겨 보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지만, 이 상황이 꼭 드라마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앞두고 병에 걸린 신부. 비련의 여주인공은 이런 심정이었나. 연기라도 정말 싫을 것 같다. 사진을 담은 CD와 소견서를 받아서 병원을 나왔다.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배에 힘을 주고 이야기했지만 그래서 더 아무런 꼴이 되고 말았다. 

 "확률이 80%래."

 "무슨 소리야. 괜찮을 거야. 얼른 가서 옷 찾고 밥 먹어. 밥 먹어야 기운 나지."

 전혀 괜찮지 않은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동이와 백화점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흔들렸을 때도 동요하지 않던 동이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 것 같았다. 없는 힘을 모아서 점심 메뉴를 고르기 위해 식당가를 걸었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동이 덕분에 평소 같았으면 한 바퀴를 더 돌았을 텐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내가 손을 잡아끌었다. 메뉴는 회전 초밥이었다. 

 "초밥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이거보다 빨리 나올 메뉴가 없어. 얼른 먹고 힘내야 한단 말이야."

 눈앞을 지나가는 알록달록한 초밥 접시를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뭘 먹을까 고민하는 얼굴을 꾸며내며 아무 접시나 집어 내렸다. 따뜻한 국을 한 숟갈 뜨고 초밥 한 알을 입에 넣었다. 그사이 동이도 연어 초밥을 골라 뚜껑을 열고 있었다. 참고로 동이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최고의 회 귀신이다.

 "동아, 먹으니까 좀 살 것 같아."

 "많이 먹어, 많이."

 내내 구겨졌던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래,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일단 밥은 맛있게 먹어야지.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은 진짜였다. 앞으로 힘든 날은 더욱 잘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 달 전 맞춘 예복을 찾으러 갔다. 정장 입은 동이를 본 게 언제였더라. 최종 합격하고 처음 만난 날 넥타이까지 매고 회사 앞으로 찾아왔었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고 동생이 예약해준 근사한 식당에서 눈 구경, 사람 구경하며 밥을 먹었더랬지. 혼자 감상에 빠져있는데 동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저 옷을 입고 동이가 결혼하는구나.' 

 기분이 이상했다. 부쩍 실감 나기도 하고 그래서 벅차기도 한데 미안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정말 큰 병에 걸린 거라면 지금이라도 멈춰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예복까지 나왔으니 어쩌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활짝 웃었다. 

 "좋은 옷 입으니까 더 잘 생겨 보이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타러 가는 길, 몸과 마음은 병원을 막 빠져나왔던 그 상태로 돌아와 있었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한 손에는 예복을 들고,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걷던 동이가 갑자기 손을 놓고 걸음을 멈췄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줄 게 있어."

 "응?"

 주섬주섬 가방에서 상자를 꺼내 열었다. 내가 보관하고 있던 결혼반지였다.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 뭐야. 이거 언제 가져갔어."

 분명히 내 방 책장에 뒀는데 이게 왜 여기 있지. 괴도 루팡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데 얼굴은 이미 엉망이 돼 버렸다. 내가 이걸 받아도 되나. 하필이면 오늘, 프러포즈를 준비한 동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닭똥 같은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나는 내가 안 울 줄 알았는데 흐끄흑흑흑..."     


 오래전 어느 기념일, 나를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고 (나름) 갑자기 집 앞에 찾아온 적이 있다. 그런데 오기 전에 평소와 달리 집에 언제 갈 거냐고 몇 분쯤 도착하냐고 백 번을 물었던 동이.

 "지금 내가 서프라이즈를 하려고 준비 중이니 대단히 놀라보렴~"

 하고 예고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집 현관 앞에 와서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에 잠시 서 있었더니 전봇대 뒤에서 스멀스멀 나타나 "짜잔" 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쿠~ 깜짝이야~" 한껏 놀라드렸다. (동아, 미안해. 나 사실 다 알고 있었어)      


 그런 사람이라 방심한 것이다. 언제 프러포즈할 거냐고 물으면 그저 웃기만 하던 동이가 이번에는 제대로 성공했다. 울음을 멈출 줄 모르는 나를 안아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제 보름 남았어. 잘 살자."

 예식장 앞에서 잊지 못할 프러포즈를 받았다. 긴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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