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저 남의 일처럼 느껴졌던 죽음이 햇살이 눈부신 평화로운 오후 갑자기 나를 둘러싸고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가 조금씩 짙어지며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아 심장이 조여든다. 하루하루 무거워지는 심장을 붙들고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내려놓고 싶어도 내려놓아지지 않는다. 잠시 잠이라는 예표를 통해서만 이 죽음의 공포를 멈출 수 있다.
이처럼 죽음이 두려웠던 적이 있었던가. 아주 먼 옛날 어린 시절 꽃 피지 못하고 떠나버린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도 서럽도록 슬프기만 했지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두 해전의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그저 불안감을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번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받아들여지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을 실감하다. 그래서 더 공포스럽고 더 불안한 것일까. 그래서인지 하루하루 죽음이라는 녀석과 대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이지만 어떻게든 조금 더 먼 시간에 마주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도 연명치료를 거부한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폐에서 시작한 암세포는 척추와 갈비뼈 골수까지 전이되었고 패혈증으로 양쪽 콩팥까지 망가졌다는 것이다. 계속 환각 증세를 보이고 있어 뇌까지 전이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된다고 한다. 유학시절 그토록 젊었고 그토록 총명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 기억 속의 그녀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엘리트였다.
바로 두 달 전에는 친한 동생의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암이라는 소식을 들은 지 두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응급실에 실려간 젊은 그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긴 날 죽음과 마주했다.
맑고 사랑스러웠던 아이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장례식장에 부모를 만나러 간 적이 있다.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어 장례식장은 눈물바다를 이룬다. 아이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화장터에서도 절대 아이를 보낼 수 없어서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을 더 이상 만 날 수 없다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슬프고도 슬펐다. 아버지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열심히 사셨던 아버지의 마지막이 이토록 초라하고 비통하며 외롭게 죽어가야만 했다는 것이 너무 서글펐다. 그러나 그 죽음은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지금 나는 한 달이 넘게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직면하고 하고 있다. 생이란 이 땅과 저 하늘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며 죽음을 남의 일처럼 관망하며 살았다. 죽음에 관해서 초연했던 내가 나만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나를 기억해 줄 이가 없다는 것이 슬퍼서도 아니다. 그저 저 세계를 앙망하며 산다고 생각했던 나의 실체를 보게 된 것이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분명 내세를 믿는 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유에서 무로 사라지는 것이 이토록 두려운 일인지 예전에 미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