볏단을 바라보고 마당에 쌓인 쌀가마를 바라볼 때 그의 마음은 환희로 가득 찼을 것이다. 계절이 지나는 동안 내내 설레었을 것이다.
추석이 오기 전 아버지는 항상 채 익지 않은 벼 단을 베어 오셨다. 낱알을 모으면 꼭 한 되 정도 나올 양이었다.
단단한 알곡이 되기 전 말랑말랑한 풋벼였다. 그 풋벼를 보고 아직 추수 때까지 남은 시간을 가늠했고 벼들이 풍작이 될지 아닐지도 가늠했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쇠칼퀴가 여럿 달린 모양의 수동탈곡기를 올린 다음 볏단을 한 줌씩 잡고 이삭 부분을 쇠스랑모양 사이사이에 끼운다. 그리고 힘껏 잡아 당겨주면 낱알 들이 돗자리에 우두두둑 쏟아진다.
낱알 들을 모아 솥에서 쪄내고 며칠 말리면 낱알이 단단해진다. 단단해진 낱알들을 절구에 찧으면 껍질과 알맹이가 분리된다. 너무 말리면 절구에 찧을 때 낱알이 싸라기처럼 부서져버리고 반면 건조가 덜되면 껍질과 분리가 어려우니 적당히 말리는 게 중요하다 .
찌고 말리고 절구에 빻고 키질을 하여 겨를 날리고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비로소 쫀득쫀득 찐쌀이 만들어진다. 전라도 내 고향에선 이 쌀을 올게쌀 이라 부른다. 다른 지방에서는 올벼쌀 이라고도 하고 밥을 지어먹기도 한다는데 사실 올게쌀로 밥을 지어먹기에는 그다지 맛이 좋지는 않다. 밥은 뭐니 뭐니 해도 갓 나온 햅쌀밥이 최고니까.
엄마도 남은 올게쌀로 몇번 밥을 해 준적이 있다. 하지만 식구들이 입도 대지 않으니 그다음부턴 딱 간식으로 해치울 만큼의 양만 만들었다. 올게쌀은 하나의 음식으로서 그 조리 과정이 몹시도 까다롭고 복잡하고 힘들다. 양이 적어 방앗간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일일이 엄마의 손이 거쳐야 했으니 엄마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거다.
동네에 떡방앗간이 생기면서 우리 집 절구도 어디로 팔려 나갔다. 그 후로 올게쌀 구경은 못해본 것 같다.
완성된 올게쌀은 노르스름 색부터 ' 나 고소 자체' 임을 말해 준다. 현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미보다는 투명한 갈색을 띤다. 적당히 말린 올게쌀은 추석까지는 보드라와서 먹기에 참 적당하다.
손바닥에 한 움큼 쥐고 한입에 털어 넣은 다음 한쪽볼이 빵빵해지도록 한껏 몰아주고 쌀이 침에 불 때까지 씹지 않고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고인 침을 간간히 삼킬라치면 그동안 녹아내린 올게쌀 물이 침에 섞여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다.
추석을 지나고도 남은 올게쌀은 학교를 오갈 때 든든한 간식거리가 되어 주었다
추석 이 지나면 머지않아 대대적인 추수철이 찾아온다.
수확하는 날이면 온 집안이 명절보다 더 떠들썩했다. 우리 동네에 아저씨들이 이리 많았나? 힘깨나 쓰는 아저씨들은 죄다 모인 듯하였다. 목청 큰 아버지의 목소리도 더욱 드높아졌다.
마당가운데 볏가마가 쌓이면 이곳은 나와 동생의 놀이터가 되었다. 올가 가고 내려가고 뛰어넘고 그러다 가마니가 무너져 발이 빠진 적도 있다.
아버지는 다친다고 안된다고 했지만 표정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보여 아버지의 잔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가마니를 높이 쌓지 않고 일부러 바닥에 널려 놓듯 쌓은 것 같다.
어린 키에도 그리 높지 않았으니 말이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에게도 농사를 멈춰야 할 시기가 왔다.
하루 일하고 일주일은 병원신세를 져야 하는 몸. 그가 어떻게 이 변화를 받아들일지... 내심 걱정이 되었으나
의외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아버지였다.
" 아버지 인생 이정도믄 잘 살지 않았겠냐? 농사도... 자식 농사도... 이정도믄 괜찮제~~~
아버지는 더 욕심이 없다, 함~~ 맨주먹으로 일제시대, 6.25 , 여순반란 그 험한 세상 다 지나왔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