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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파란 Sep 23. 2023

나의 간 기증이 살린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이제와 돌이켜 보니


“남편을 엄청 사랑하나 봐”     


우리 부부가 간 이식을 결정하고 수술을 치르고 회복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깔깔대고 웃었다. 사랑이라니. 내게 스며들지 못하고 내내 겉돌던 그 말이 계속 쌓이다 보니 문득 나도 궁금했다. 정말 사랑인 건가? 물론 사랑해서 부부가 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떠올릴 겨를도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그때의 나는 ‘최악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처럼 하루하루가 새로운 지옥이었고 닥치는 대로 감당해야 했던 시간을 겪는 중이었다. 위태로운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의연한 척했고 무서웠지만 겁쟁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울지 않았다. 내 불안과 공포를 그저 ‘사랑’이라는 말로 덮어버리는 건 어쩐지 억울했다.



지난한 암과 싸움의 결과, 내 인생에서 만날 거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간 이식’이라는 엄청난 임무가 주어졌고 우리 부부는 각자의 목숨을 건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어차피 이혼하면 남남인데 굳이 왜 목숨을 거냐, 둘 중 하나라도 살아서 아이들 키워야 하는 거 아니냐 등의 걱정인지 비수인지 모를 말들을 들어야 했지만 결국에는 얼마나 사랑하면 이 힘든 결정을 내렸을까,라는 내 사랑의 깊이를 확인했다는 탄식과 함께 우리 부부는 자연스레 '천생연분'이라는 틀에 끼워졌다.



사랑이든 아니든 난 남편의 간 공여자가 되었다. 이식 수술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당시 남편의 암은 다른 장기에 전이가 되지도 않았고, 수술 후 회복에도 문제가 없을 거라는 의료진의 희망적인 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절망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바늘구멍 같은 확률 앞에 놓였더라도 난 기어코 수술대에 올랐을 것이다. 남겨진 사람이 겪는 영혼의 고통보다는 수술 후 몸의 고통을 겪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여전히 ‘암’은 수시로 고개를 들이밀며 위용을 과시하는 듯 다양한 후유증을 보여주고 있지만, 더 이상 까무러치게 무섭고 무턱대고 벌벌 떠는 공포의 존재만은 아니다. 평생 함께 가야 하는 동행자일 뿐이다.


     



깜깜했던 내 마음에 빛이 들어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퍼런 빛에서 점차 붉게 변하는 아침 해처럼, 창가에 놓인 몬스테라 이파리 그림자가 거실 벽을 스치고 주방까지 따스함이 밀려 들어오는 것처럼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견디며 오롯이 나를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행히 그런 나날을 거쳐 수년 동안 남들이 내게 던졌던 ‘사랑’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이 아프기 전에는 여느 부부가 그렇듯 우리에게도 위기가 있었고 끝을 고민했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둘이 함께 공유하고 극복해야 하는 비극 앞에서 과거의 불행 따위는 잊혔고 어느새 합을 맞춰 고난을 헤쳐나가야 하는 팀이 되었다. 그리고 그건 아낌없이 주고, 남김없이 책임을 다한 진정한 ‘사랑’이었다. 사랑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 아닌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저절로 행했던 사랑이었다고 마음을 다잡으니 어지러웠던 내 세계가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후련했고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승리의 몸이 된 것 같은 씩씩한 기분마저 들었다. 여전히 삶은 녹록지 않지만, 두려울 건 없다. 내가 싫은 건 잘라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겼고 뭐라도 일단 해보자 하는 담대함도 얻었다.



'간도 떼줬는데 까짓것!'       


     

지금의 난, 과거의 나보다 확실히 더 나은 인간이 됐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쉽고 빠른 길은 없었다. 칠흑 같은 가시밭길을 뛰고 기고 굴러서 여기까지 왔지만, 그 덕에 난 다른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 남편의 암에 떠밀려 내 몸과 마음을 던졌지만, 결국 내가 살린 건 나였다. 다시 태어난 건 남편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건 치열했던 극복에 대한 기록이다.



간이식 수술 당시 팔목에 차고 있던 환자인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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